어제 새벽에 눈앞에 있었던 풍경이다.
사진이 찍힌 시간은 대략 아침 6시 정도...앞의 문장에서 어제라 했으니..미국 날짜로 9월 14일 토요일 새벽 6시라 하겠다.
워라벨을 찾아 미국이나 캐나다 등의 선진국에 온다고 하지만..그건 이미 한국에서 풍요한 이들의 희망사항이겠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외노자들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다.. 새벽밥을 먹고 멸치잡이 배에 몸을 싣는 경남 남해의 방글라데시 노동자와 미국 수도에 해당하는 지역의 우리가 별 다를 바가 없다.
주말 새벽 아침이라도, 현재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여지가 있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야 한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대충의 열량을 몸에 때려 넣고 40분 운전을 해서 회사 실험실에 도착하니, 얼마전 회사에 합류한 중국인 동료가 먼저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회사 문을 열고 보안 알람을 푸는 건 나였는데..그가 먼저 있었다. 이번 달에 회사에 합류한 그가 5월 경에 입사전 방문을 했을 때 그의 인상을 여전히 기억한다.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그 지역의 강한 햇살 때문일까..검게 그을려 있었고..말랐으며..눈가엔 주름이 자글거렸다. 대부분 백면서생에 가까운 내가 아는 허여멀건한 실험실 노동자라기 보다 시골 촌부에 가까운 행색의 그가..먼저 반갑게 활짝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을 때, 손바닥에 닿는 그의 체온보다 먼저 가슴에 박힌 것은 그의 웃음 안쪽 치아의 절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상악 전치부의 절반이 보이지 않았고 하악의 전치부도 마찬가지였다. 잇몸은 허물어져 있었고, 치근의 절반정도는거의 다 노출되었다 말해도 무방했겠다. 그의 지난했던 미국생활이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박사과정을 하던 중, 추수감사절 직전에 뜨거운 걸 먹다가 갑자기 엄청난 치통이 엄습했었다. 치과보험이 없는 상태였고, 추수감사절이라는 미국의 대명절이었다. 가장 강력한 진통제는 통장잔고에 대한 인식이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시중에서 살 수 있는 도포용 리도카인 (국소마취제)를 퍼마시다시피 입안에 들어부어 3일을 버티다, 나흘 째 되는 시점에 자연적으로 신경이 죽어 고통에서 해방 될 수 있었다. 결국 그 치아는 나의 임종을 함께 하지 못하고 먼저 나를 떠났다.
치아 한두개의 고통도 쉽지 않은데...인간의 오복 중에 하나라는 치아의 절반 이상이 결실된 채, 그리고 다시 채워놓지 않은 그 생활이 어떨지...이런 저런 짐작을 하면서 여전히 나는 그의 웃음이 많은 그의 미소가 만개할 때마다 만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그는 세계 최초로 오렌지 나무의 유전 형질 변형을 CRISPR (소위 유전자 가위라고 소개되는 그 기술)를 이용해서 구현해 낸
과학자이다. PI 경력 없이 인용 횟수가 수천회에 달하는 그는 분명 유능한 연구자이고 또한. 고도로 훈련된 식물조직배양 기술자이기도 하다. 나와 같은 시기에 박사를 하다 중국에 돌아가 소위 말하는 사회적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인물들을 돌이켜 보면, 그에게 없는 것은 그저 약간의 운과 뒷배정도인 듯 싶다.
아침에 일할 것들을 세팅을 하고 회사 탕비실에서 그와 이야기를 했다. 미명을 뜨는 시간 회사라는 공간에서 단 둘이 있는 감상은 자못 진지했다. 그가 가족이 있고, 딸은 대학 사학년 아들은 중학교 일학년 이며 여전히 플로리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구강상태가 더욱 이해가 되었다. 쥐꼬리 만한 포닥 월급은 그의 치아가 되기 이전에 가족들의 입에 들어갈 먹을 거리가 되기 급급했을 것이다.
우리회사는 내가 포닥시절 받았던 연봉의 대략 2배정도를 준다. 플로리다의 임금 수준이 내가 있는 곳보다 좋치 못하니, 나도 마찬가지 지만 그도 미국에 있는 시간동안 중에서 받아본 급여 중 가장 많은 급여를 받고 있는게 될 것이다. 가족을 떠나, 먼 북쪽 이곳의, 미래가 불확실한 스타트업으로 뛰어든 그의 결정 요인의 전부지 않을까 싶다.
회사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회사가 커지고 안정적이 되면 가족들을 이곳으로 불러오고 싶다고 한다. 아직 여름의 열기가 다 가시지 않은 새벽녘에 출근해서 밤 늦게까지 일을 하는 그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치아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입과 주름이 가득한 눈가로 활짝 웃음을 짓고 돌아서서 다시 실험을 시작하는 그의 왜소한 뒷모습에서 사력(死力)이라는 두글자가 떠올랐다.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하고 있구나..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뒷모습에 마음이 뭉클하다. 같은 공간에 전력을 다해 일하는 이가 함께 있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고 의지가 되는 일이다.
자본주의의 노예니 속성이니, 이민사회의 불공평이니 이런 저런 불평불만해도...당장 밥을 버는 일을 놓을 수가 없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은, 삶 자체의 이면이자 동반임으로 그것이 쉽지 못함을..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그저 주저 앉아서 불평만 하기에는 우린 지난 시간동안 참 많은 노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성취들을 이루어 왔다. 물론 그것이 경제적 성과와 직결되었다고 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이 회사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낼지, 혹은 정말로 우리 업계의 유니콘이 되어 떠오를지..여전히 알 수 없지만..
사력을 다하는 동료가 있다면..나 또한 최선을 다해서 가는데 까지 가보는 그런 베팅을 해볼만하지 않나그런 생각이..
그의 좁고 굽은 어깨에 기대어 들었다.
인생 뭐 있나...사는거 다 고만고만하고..노력할 만한 즐거운 일이라면...하는데 까지..최선을 다해보고 안되면 말고..되면..
운이 좋았음을 하늘에 감사하며 누군가를 돕는데 인색하지 않게 베풀며 살다 가면 그만인거겠지..
어제 새벽에 눈앞에 있었던 풍경이다.
사진이 찍힌 시간은 대략 아침 6시 정도...앞의 문장에서 어제라 했으니..미국 날짜로 9월 14일 토요일 새벽 6시라 하겠다.
워라벨을 찾아 미국이나 캐나다 등의 선진국에 온다고 하지만..그건 이미 한국에서 풍요한 이들의 희망사항이겠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외노자들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다.. 새벽밥을 먹고 멸치잡이 배에 몸을 싣는 경남 남해의 방글라데시 노동자와 미국 수도에 해당하는 지역의 우리가 별 다를 바가 없다.
주말 새벽 아침이라도, 현재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여지가 있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야 한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대충의 열량을 몸에 때려 넣고 40분 운전을 해서 회사 실험실에 도착하니, 얼마전 회사에 합류한 중국인 동료가 먼저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회사 문을 열고 보안 알람을 푸는 건 나였는데..그가 먼저 있었다. 이번 달에 회사에 합류한 그가 5월 경에 입사전 방문을 했을 때 그의 인상을 여전히 기억한다.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그 지역의 강한 햇살 때문일까..검게 그을려 있었고..말랐으며..눈가엔 주름이 자글거렸다. 대부분 백면서생에 가까운 내가 아는 허여멀건한 실험실 노동자라기 보다 시골 촌부에 가까운 행색의 그가..먼저 반갑게 활짝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을 때, 손바닥에 닿는 그의 체온보다 먼저 가슴에 박힌 것은 그의 웃음 안쪽 치아의 절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상악 전치부의 절반이 보이지 않았고 하악의 전치부도 마찬가지였다. 잇몸은 허물어져 있었고, 치근의 절반정도는거의 다 노출되었다 말해도 무방했겠다. 그의 지난했던 미국생활이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박사과정을 하던 중, 추수감사절 직전에 뜨거운 걸 먹다가 갑자기 엄청난 치통이 엄습했었다. 치과보험이 없는 상태였고, 추수감사절이라는 미국의 대명절이었다. 가장 강력한 진통제는 통장잔고에 대한 인식이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시중에서 살 수 있는 도포용 리도카인 (국소마취제)를 퍼마시다시피 입안에 들어부어 3일을 버티다, 나흘 째 되는 시점에 자연적으로 신경이 죽어 고통에서 해방 될 수 있었다. 결국 그 치아는 나의 임종을 함께 하지 못하고 먼저 나를 떠났다.
치아 한두개의 고통도 쉽지 않은데...인간의 오복 중에 하나라는 치아의 절반 이상이 결실된 채, 그리고 다시 채워놓지 않은 그 생활이 어떨지...이런 저런 짐작을 하면서 여전히 나는 그의 웃음이 많은 그의 미소가 만개할 때마다 만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그는 세계 최초로 오렌지 나무의 유전 형질 변형을 CRISPR (소위 유전자 가위라고 소개되는 그 기술)를 이용해서 구현해 낸
과학자이다. PI 경력 없이 인용 횟수가 수천회에 달하는 그는 분명 유능한 연구자이고 또한. 고도로 훈련된 식물조직배양 기술자이기도 하다. 나와 같은 시기에 박사를 하다 중국에 돌아가 소위 말하는 사회적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인물들을 돌이켜 보면, 그에게 없는 것은 그저 약간의 운과 뒷배정도인 듯 싶다.
아침에 일할 것들을 세팅을 하고 회사 탕비실에서 그와 이야기를 했다. 미명을 뜨는 시간 회사라는 공간에서 단 둘이 있는 감상은 자못 진지했다. 그가 가족이 있고, 딸은 대학 사학년 아들은 중학교 일학년 이며 여전히 플로리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구강상태가 더욱 이해가 되었다. 쥐꼬리 만한 포닥 월급은 그의 치아가 되기 이전에 가족들의 입에 들어갈 먹을 거리가 되기 급급했을 것이다.
우리회사는 내가 포닥시절 받았던 연봉의 대략 2배정도를 준다. 플로리다의 임금 수준이 내가 있는 곳보다 좋치 못하니, 나도 마찬가지 지만 그도 미국에 있는 시간동안 중에서 받아본 급여 중 가장 많은 급여를 받고 있는게 될 것이다. 가족을 떠나, 먼 북쪽 이곳의, 미래가 불확실한 스타트업으로 뛰어든 그의 결정 요인의 전부지 않을까 싶다.
회사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회사가 커지고 안정적이 되면 가족들을 이곳으로 불러오고 싶다고 한다. 아직 여름의 열기가 다 가시지 않은 새벽녘에 출근해서 밤 늦게까지 일을 하는 그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치아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입과 주름이 가득한 눈가로 활짝 웃음을 짓고 돌아서서 다시 실험을 시작하는 그의 왜소한 뒷모습에서 사력(死力)이라는 두글자가 떠올랐다.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하고 있구나..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뒷모습에 마음이 뭉클하다. 같은 공간에 전력을 다해 일하는 이가 함께 있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고 의지가 되는 일이다.
자본주의의 노예니 속성이니, 이민사회의 불공평이니 이런 저런 불평불만해도...당장 밥을 버는 일을 놓을 수가 없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은, 삶 자체의 이면이자 동반임으로 그것이 쉽지 못함을..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그저 주저 앉아서 불평만 하기에는 우린 지난 시간동안 참 많은 노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성취들을 이루어 왔다. 물론 그것이 경제적 성과와 직결되었다고 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이 회사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낼지, 혹은 정말로 우리 업계의 유니콘이 되어 떠오를지..여전히 알 수 없지만..
사력을 다하는 동료가 있다면..나 또한 최선을 다해서 가는데 까지 가보는 그런 베팅을 해볼만하지 않나그런 생각이..
그의 좁고 굽은 어깨에 기대어 들었다.
인생 뭐 있나...사는거 다 고만고만하고..노력할 만한 즐거운 일이라면...하는데 까지..최선을 다해보고 안되면 말고..되면..
운이 좋았음을 하늘에 감사하며 누군가를 돕는데 인색하지 않게 베풀며 살다 가면 그만인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