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예능 발표회 준비를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날짜는 자꾸 가는데 연습이나 준비를 거의 못했다고 해서, 필자가 좋은 수가 있다고 시계만 있으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게다가 ‘너네’ 학교 발표회 역사에 획기적인 예로 남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 꼬맹이가 듣기에도 황당했나보다. 진심으로 우리 첫 딸이 걱정되어 묘안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정말 무리였을까? 결국은 필자가 제안한 작품은 그날 발표회 무대에 올라가지 못했다.
이 추천작을 작곡한 존 케이지(John Milton Cage, Jr.), 이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는 개인적으로도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현대음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케이지의 실험 정신, 아니 모험 정신이라 해야 더 어울릴까, 아무튼 그 하나만큼은 예술가만이 아니라 연구자들에게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국 아티스트 중에는 백남준 등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지만, 황당함과 신선함은 그야말로 백지장 차이려나.
그런데, 정말 백지장 같은 작품, 이걸 굳이 작곡을 했다고 할 수 있나 같은 작품을 케이지가 세상에 선보였다. 어떻게 보면 짧게만 잡아도 수백 년은 되는 음악사에 이런 경우가 없었다는 사실도 무척 신기하다. 시계만 준비하면 된다고 한 그 작품은, 바로 “4분 33초”라는 ‘피아노’ 곡이다.
무슨 곡 제목이 이러냐고? 일단 제목 자체가 시간을 지칭하니 시계가 필요하겠거니 하는 짐작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연주에 걸리는 시간 자체가 제목이다! 이 작품이 역사상 아예 아니면 거의 (필자가 음악사 구석구석까지 “모든” 작품을 알지는 못하므로) 유례가 없는 측면은 두 가지 점에서다.
하나는 연주 시간을 아예 못박았다는 점. 연주곡은 대개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모든 음표 분량을 동일하게 연주한다 하더라도 빠르기 자체가 약간씩 다르므로, 전체 연주 시간은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게다가 도돌이표가 중간에 들어간 작품은, 이를 지킬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도 더 큰 차이가 난다. 또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곡이 길면 길수록, 그 연주 시간의 스펙트럼은 더 넓어진다. 가령, 간간 이전에도 언급은 했지만 그래도 언젠가 집중적으로 다시 한번 모아서 다룰 대작인 J. S. Bach의 “Goldberg Variation”(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보면 평균적으로 70분 내외로 연주하지만, 정말 짧은 연주부터 아주 긴 연주까지 아우른다면 약 40분이 채 못 되는 데서 90분이 넘는 사이로 분포한다. 그러하기에, 간혹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콩쿠르 같은 데 출전해 제한시간을 지키려 할 때, 정말 귀신같이 번번 같은 연주시간으로 연주하도록 아주 많이 연습을 해야 할까? 아무리 전공자라도 무척 어려워 보이는 벽 같은데, 여러 곡을 배합하면 그나마 낫지만 한 곡을 골라서 제한시간을 맞추려면 훨씬 어려울 법도 하다. 가령 30분이 제한시간인데, 30분 정도 길이 곡을 골랐다면? 대체로 전체 빠르기를 조금 높게 잡아서 안전하게 이 시간 안에 끝내는 선택이 1순위로 가능하지만, 또 30분이라는 시간을 1초라도 더 낭비하지 않고 쓰려면, 아쉬워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30분 제한시간이라는 기준의 의미가 꼭 그 시간을 다 쓰라는 법은 아니긴 하지만. 그만큼, 같은 곡이라도, 그리고 지시(도돌이표까지 모두 포함해)를 동일하게 지키더라도 연주 시간은 제각각이다.
반면, “4분 33초”는 4분 33초를 칼같이 지켜야 하거나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다소 다르다. 그 제목 자체 또한 음표나 다른 악상기호처럼 지시로 해석하기 때문인데, 즉 작품명 영향으로 시계를 들고 등장하다 보니 시간이 그대로 지켜지기 때문인데, 사실 연주 길이 자체를 따로 악보에 지시하지 않았고, 제목만 그러하다. 따라서, 아무 소리도 안 나는 이 곡에도 엄연히 ‘템포’(tempo)가 존재한다(아래 오케스트라 편곡 영상 참고).
또 하나는 악보에 아무 콩나물도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연주 소요 시간을 결정해 주는 듯한 특이성마저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그야말로 백미다. 아무리 침묵(쉼표)도 음악의 일부라지만, 그냥 백지장과도 다름 없는 구조로 세상에 등장한 이 작품. 당연히 공개 당시부터도 논란이었다. 그러니까, 4분 33초만 지키고 연주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 어떤 측면에선, 악기 소리만 내지 않으면 뭐든 해도 된다. 이 곡은 피아노 곡으로 작곡되었으므로 대개는 연주 컨셉이 피아노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방식이다. 하지만, 어차피 악기 소리를 못 내는데 피아노든 뭐든 관계가 없지 않은가? 그런 면도 더러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피아노 곡으로 발표했지만, 작곡가 자신도 악기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그래서인지, 우스꽝스럽지만 이것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도 했단 후문도 들린다.
케이지는 우연성(다소 항의의 소지는 있지만, 일면에서 과학계 언어의 하나를 빌려서 표현하면 ‘양자역학적’인)의 음악가로 대변되기도 하는데, 케이지나 “4분 33초”나 본 편의 소재지 주제는 아니므로, 더 자세히 들어가지 않고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 위해 결정적인 한마디로 특징을 압축해보면, 콩나물들이 있어서 이들 음표를 연주하는 곡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아무 음들을 연주하지 않는 작품 또한 연주할 때마다 그 ‘연주’가 달라서, 세상에서 같은 작품의 ‘동일한’ 연주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악기 음이 아닌, 다른 모든 소리에 열려 있으므로, 그 변용되는 범위가 훨씬 더 넓다. 작곡자의 의도는, 그 4분 33초 동안 발생하는 모든 (피아노 곡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 연주자의 피아노 소리는 아닌) 사운드 자체가 작품의 구성 요소로서 작품의 연주를 완성한다는,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운드의 (그것이 무엇이 될지 몰라도) 무궁무진한 가능성,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작품이다. 하나 재밌는 사실은, 케이지가 이 정도까지 내다보고 의도하진 못했겠지만, 과거엔 아날로그(일명 ‘바늘’) 시계, 또는 아날로그나 디지털 스톱워치를 들고 피아니스트가 등장했지만 요즘엔 어떨까? 그냥 스마트폰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아울러, 아주 다양한 풍경이 펼쳐진다. 최근 한 명피아니스트의 한국 무대 앙코르에서 이 곡이 올라왔는데, 그 4분 33초가 흐르는 중간에 ‘love you’라는 청중의 환호도 들렸다고 한다.
요즘 기초과학 담론이 오가는 포럼에 두어 차례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리고 연구 현장에서도 관련하여 고심에 빠져들게 만드는 일들을 실제로도 겪는데, 기초과학의 가치를 자꾸 산업성, 응용성, 경제성에서, 곧 그 자체가 아니라 상대적 관계성에서 찾으려는 사상이나 실천이 점점 거세지고 있어, 한편으로는 우려스럽다. 그런 실용적 가치를 외면하거나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목적적이 되어서는 가능성이 풍부한 기초학문을 자승자박하는 셈이 아닐까도 싶다. 물론 한편으로는 아주 현실적인 “의대 광풍”에도 맞서야(?) 하는 압력이 큰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점도 이해한다.
하지만, 다 좋다 쳐도, 기초과학의 1차 존재 이유란, 적어도 실용성 이전에, 마치 이 “4분 33초”와 같은 작품을 특징짓는 성격과 비슷하지 않을까? 새하얀 무한한 가능성의 지경. 그 가능성이란 건 당연히 실용적일 수도 아닐 수도 있으며, 더 엄밀히 말하면, 무엇이 실용적인지 아닌지 미리 재단하기도 상당히 어렵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듯하니, 애써 자꾸 불확실한 제한적 목적성에 갇힐 필요는 없지 않나 싶다.
연구 현장에서도, 가령, 기업체 소속 연구소라면 실용성 또는 ‘돈됨성’을 강조하는 풍토야 당연하지만, 필자도 그러한 철학 하에 연구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실용 연구를 하는 곳이지 기초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의미심장한 연구나 역량 강화 활동이 제한될 때는 (경험으로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비효율적으로 같은 과정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연구 조직에 과연 어느 쪽이 더 좋은지 간혹 혼선이 생긴다) 특히나 상당히 시대착오적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이론 연구면 모두 실용적이지 않은 기초 연구라는 인식마저도 강한 분위기를 간간 느끼기도 한다. 무엇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 줄 알고? 드문 사례를 일반화하려는 의도는 없더라도, 그만큼 임팩트나 시사점이 큰 사례로, 어떻게 노벨상(이 자체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적으로 상징적인 예로)이 기업 연구소에서도 나올 수 있는지 (한국에선 왜 그것이 어려울지) 면밀히 파헤쳐볼 이유는 (미국 기업이 지니는 과학사적인 특수성은 다소 차치하더라도) 충분하다고 본다.
이 정도가 되고 보면, 아예 ‘기초’(연구나 과학)라는 말을 안 쓰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마치, 개인적으로 편의상 불가피하게 쓰면서도 좀 다른 말이 없나 싶은 ‘데이터 과학’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이 말은 참 전달하는 정보도 없고 오히려 혼선이나 오해만 야기한다고 생각해서인데, 이에 비하면 ‘기초’라는 수사가 앞으로 달리면서 시공간적으로 미치는 파장은 훨씬 큰 듯하다.
@ 원 피아노 독주곡 - 위에서 언급한 최근 내한한 명피아니스트의 베르비에 페스티벌 연주 영상, 정확히 4:33를 따른다.
@ 오케스트라용 ‘편곡’ - 그 유명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인데, 템포(?)를 빠르게 잡은 듯하다.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예능 발표회 준비를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날짜는 자꾸 가는데 연습이나 준비를 거의 못했다고 해서, 필자가 좋은 수가 있다고 시계만 있으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게다가 ‘너네’ 학교 발표회 역사에 획기적인 예로 남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 꼬맹이가 듣기에도 황당했나보다. 진심으로 우리 첫 딸이 걱정되어 묘안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정말 무리였을까? 결국은 필자가 제안한 작품은 그날 발표회 무대에 올라가지 못했다.
이 추천작을 작곡한 존 케이지(John Milton Cage, Jr.), 이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는 개인적으로도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현대음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케이지의 실험 정신, 아니 모험 정신이라 해야 더 어울릴까, 아무튼 그 하나만큼은 예술가만이 아니라 연구자들에게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국 아티스트 중에는 백남준 등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지만, 황당함과 신선함은 그야말로 백지장 차이려나.
그런데, 정말 백지장 같은 작품, 이걸 굳이 작곡을 했다고 할 수 있나 같은 작품을 케이지가 세상에 선보였다. 어떻게 보면 짧게만 잡아도 수백 년은 되는 음악사에 이런 경우가 없었다는 사실도 무척 신기하다. 시계만 준비하면 된다고 한 그 작품은, 바로 “4분 33초”라는 ‘피아노’ 곡이다.
무슨 곡 제목이 이러냐고? 일단 제목 자체가 시간을 지칭하니 시계가 필요하겠거니 하는 짐작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연주에 걸리는 시간 자체가 제목이다! 이 작품이 역사상 아예 아니면 거의 (필자가 음악사 구석구석까지 “모든” 작품을 알지는 못하므로) 유례가 없는 측면은 두 가지 점에서다.
하나는 연주 시간을 아예 못박았다는 점. 연주곡은 대개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모든 음표 분량을 동일하게 연주한다 하더라도 빠르기 자체가 약간씩 다르므로, 전체 연주 시간은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게다가 도돌이표가 중간에 들어간 작품은, 이를 지킬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도 더 큰 차이가 난다. 또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곡이 길면 길수록, 그 연주 시간의 스펙트럼은 더 넓어진다. 가령, 간간 이전에도 언급은 했지만 그래도 언젠가 집중적으로 다시 한번 모아서 다룰 대작인 J. S. Bach의 “Goldberg Variation”(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보면 평균적으로 70분 내외로 연주하지만, 정말 짧은 연주부터 아주 긴 연주까지 아우른다면 약 40분이 채 못 되는 데서 90분이 넘는 사이로 분포한다. 그러하기에, 간혹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콩쿠르 같은 데 출전해 제한시간을 지키려 할 때, 정말 귀신같이 번번 같은 연주시간으로 연주하도록 아주 많이 연습을 해야 할까? 아무리 전공자라도 무척 어려워 보이는 벽 같은데, 여러 곡을 배합하면 그나마 낫지만 한 곡을 골라서 제한시간을 맞추려면 훨씬 어려울 법도 하다. 가령 30분이 제한시간인데, 30분 정도 길이 곡을 골랐다면? 대체로 전체 빠르기를 조금 높게 잡아서 안전하게 이 시간 안에 끝내는 선택이 1순위로 가능하지만, 또 30분이라는 시간을 1초라도 더 낭비하지 않고 쓰려면, 아쉬워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30분 제한시간이라는 기준의 의미가 꼭 그 시간을 다 쓰라는 법은 아니긴 하지만. 그만큼, 같은 곡이라도, 그리고 지시(도돌이표까지 모두 포함해)를 동일하게 지키더라도 연주 시간은 제각각이다.
반면, “4분 33초”는 4분 33초를 칼같이 지켜야 하거나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다소 다르다. 그 제목 자체 또한 음표나 다른 악상기호처럼 지시로 해석하기 때문인데, 즉 작품명 영향으로 시계를 들고 등장하다 보니 시간이 그대로 지켜지기 때문인데, 사실 연주 길이 자체를 따로 악보에 지시하지 않았고, 제목만 그러하다. 따라서, 아무 소리도 안 나는 이 곡에도 엄연히 ‘템포’(tempo)가 존재한다(아래 오케스트라 편곡 영상 참고).
또 하나는 악보에 아무 콩나물도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연주 소요 시간을 결정해 주는 듯한 특이성마저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그야말로 백미다. 아무리 침묵(쉼표)도 음악의 일부라지만, 그냥 백지장과도 다름 없는 구조로 세상에 등장한 이 작품. 당연히 공개 당시부터도 논란이었다. 그러니까, 4분 33초만 지키고 연주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 어떤 측면에선, 악기 소리만 내지 않으면 뭐든 해도 된다. 이 곡은 피아노 곡으로 작곡되었으므로 대개는 연주 컨셉이 피아노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방식이다. 하지만, 어차피 악기 소리를 못 내는데 피아노든 뭐든 관계가 없지 않은가? 그런 면도 더러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피아노 곡으로 발표했지만, 작곡가 자신도 악기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그래서인지, 우스꽝스럽지만 이것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도 했단 후문도 들린다.
케이지는 우연성(다소 항의의 소지는 있지만, 일면에서 과학계 언어의 하나를 빌려서 표현하면 ‘양자역학적’인)의 음악가로 대변되기도 하는데, 케이지나 “4분 33초”나 본 편의 소재지 주제는 아니므로, 더 자세히 들어가지 않고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 위해 결정적인 한마디로 특징을 압축해보면, 콩나물들이 있어서 이들 음표를 연주하는 곡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아무 음들을 연주하지 않는 작품 또한 연주할 때마다 그 ‘연주’가 달라서, 세상에서 같은 작품의 ‘동일한’ 연주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악기 음이 아닌, 다른 모든 소리에 열려 있으므로, 그 변용되는 범위가 훨씬 더 넓다. 작곡자의 의도는, 그 4분 33초 동안 발생하는 모든 (피아노 곡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 연주자의 피아노 소리는 아닌) 사운드 자체가 작품의 구성 요소로서 작품의 연주를 완성한다는,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운드의 (그것이 무엇이 될지 몰라도) 무궁무진한 가능성,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작품이다. 하나 재밌는 사실은, 케이지가 이 정도까지 내다보고 의도하진 못했겠지만, 과거엔 아날로그(일명 ‘바늘’) 시계, 또는 아날로그나 디지털 스톱워치를 들고 피아니스트가 등장했지만 요즘엔 어떨까? 그냥 스마트폰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아울러, 아주 다양한 풍경이 펼쳐진다. 최근 한 명피아니스트의 한국 무대 앙코르에서 이 곡이 올라왔는데, 그 4분 33초가 흐르는 중간에 ‘love you’라는 청중의 환호도 들렸다고 한다.
요즘 기초과학 담론이 오가는 포럼에 두어 차례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리고 연구 현장에서도 관련하여 고심에 빠져들게 만드는 일들을 실제로도 겪는데, 기초과학의 가치를 자꾸 산업성, 응용성, 경제성에서, 곧 그 자체가 아니라 상대적 관계성에서 찾으려는 사상이나 실천이 점점 거세지고 있어, 한편으로는 우려스럽다. 그런 실용적 가치를 외면하거나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목적적이 되어서는 가능성이 풍부한 기초학문을 자승자박하는 셈이 아닐까도 싶다. 물론 한편으로는 아주 현실적인 “의대 광풍”에도 맞서야(?) 하는 압력이 큰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점도 이해한다.
하지만, 다 좋다 쳐도, 기초과학의 1차 존재 이유란, 적어도 실용성 이전에, 마치 이 “4분 33초”와 같은 작품을 특징짓는 성격과 비슷하지 않을까? 새하얀 무한한 가능성의 지경. 그 가능성이란 건 당연히 실용적일 수도 아닐 수도 있으며, 더 엄밀히 말하면, 무엇이 실용적인지 아닌지 미리 재단하기도 상당히 어렵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듯하니, 애써 자꾸 불확실한 제한적 목적성에 갇힐 필요는 없지 않나 싶다.
연구 현장에서도, 가령, 기업체 소속 연구소라면 실용성 또는 ‘돈됨성’을 강조하는 풍토야 당연하지만, 필자도 그러한 철학 하에 연구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실용 연구를 하는 곳이지 기초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의미심장한 연구나 역량 강화 활동이 제한될 때는 (경험으로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비효율적으로 같은 과정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연구 조직에 과연 어느 쪽이 더 좋은지 간혹 혼선이 생긴다) 특히나 상당히 시대착오적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이론 연구면 모두 실용적이지 않은 기초 연구라는 인식마저도 강한 분위기를 간간 느끼기도 한다. 무엇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 줄 알고? 드문 사례를 일반화하려는 의도는 없더라도, 그만큼 임팩트나 시사점이 큰 사례로, 어떻게 노벨상(이 자체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적으로 상징적인 예로)이 기업 연구소에서도 나올 수 있는지 (한국에선 왜 그것이 어려울지) 면밀히 파헤쳐볼 이유는 (미국 기업이 지니는 과학사적인 특수성은 다소 차치하더라도) 충분하다고 본다.
이 정도가 되고 보면, 아예 ‘기초’(연구나 과학)라는 말을 안 쓰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마치, 개인적으로 편의상 불가피하게 쓰면서도 좀 다른 말이 없나 싶은 ‘데이터 과학’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이 말은 참 전달하는 정보도 없고 오히려 혼선이나 오해만 야기한다고 생각해서인데, 이에 비하면 ‘기초’라는 수사가 앞으로 달리면서 시공간적으로 미치는 파장은 훨씬 큰 듯하다.
@ 원 피아노 독주곡 - 위에서 언급한 최근 내한한 명피아니스트의 베르비에 페스티벌 연주 영상, 정확히 4:33를 따른다.
@ 오케스트라용 ‘편곡’ - 그 유명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인데, 템포(?)를 빠르게 잡은 듯하다.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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