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충남대 교수 생명시스템과학대학)
1. 논문관련 분야의 소개, 동향, 전망을 설명, 연구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
Genome Res., Nov 02 2023, gr.278124.123 | https://doi.org/10.1101/gr.278124.123
Telomeric repeat evolution in the phylum Nematoda revealed by high-quality genome assemblies and subtelomere structures
이 연구는 신림동 꼭대기쪽 자취방 뒤에 있던 감나무에서 시작됐습니다. 저는 존경해마지 않는 이준호 선생님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했는데, 그때 연구실에서 키우던 예쁜꼬마선충 말고 다른 새로운 야생 선충을 다양하게 채집하고 싶었거든요. 이런 야생 선충을 새로운 모델생물을 개발하고 싶단 생각을 했던 겁니다. 예쁜꼬마선충 말고도 새롭고 신기한 선충들이 많을 텐데, 이런 걸 연구하면 더 재밌는 연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곧장 채집하러 나갔습니다. 마침 자취하던 방이 산 꼭대기에 있었고(월세가 쌌습니다), 뒤쪽에 바로 감나무가 있었는데요, 감을 따질 않고 그대로 두니 가을쯤 되면 바닥이 온통 썩은 감 천지였어요. 선충 중 일부는 이렇게 썩은 과일에서 살고 있는 미생물을 먹고 살기 때문에, 썩은 감 주워가면 진짜 선충이 살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바로 퇴근하면서 연구실에서 50 mL짜리 플라스틱 통(conical tube)을 몇 개 주섬주섬 챙겼고, 다음날 일어나서 출근하는 길에 썩은 감을 몇 개 주웠습니다. 냄새가 엄청나긴 하더라고요. 코 쥐어 막고는 썩은 감에 물을 대충 붓고 섞은 뒤 현미경에서 관찰했습니다. 그 작은 썩은 감 하나에 놀랄 정도로 많은 선충이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 연구 시작할 때는 이러한 선충들의 유전체 지도를 잔뜩 만들어서 그걸로 논문 하나 크게 내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논문 방향이 많이 달랐습니다. 선충 채집을 시작할 즈음만 해도 롱리드 시퀀싱(long-read sequencing)이라는 기법으로 다양한 생물의 유전체 지도를 제작하는 연구들이 정말 좋은 학술지에 계속 실리고 있었던 시점이거든요. 때마침 기술도 발전해 품질도 좋아지고 금액도 저렴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살고 있는 이 선충들의 DNA를 잘 뽑고, 유전체 지도를 만들고, 그걸 잔뜩 모아서 새로운 모델생물의 유전체 지도라는 자원을 공개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준호 선생님께서 이런 제 생각을 정말 많이 지지해주셨습니다. 사실 이준호 선생님 연구실은 예쁜꼬마선충으로 다양한 유전학을 하는 연구실이지, 야생 선충 채집하고 분석하는 그런 연구를 주로 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연구실 선배들이 사과밭 가서 채집하는 일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제가 연구실 들어간 뒤로는 그 일이 주요 연구 분야는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께서 정말 많은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유전체 지도를 작성할 수 있는 연구비를 제공해주시고, 이런 일을 제 주요 연구로 진행할 수 있도록 신경 써주셨거든요. 게다가 사과밭도 섭외해주시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겁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다양한 지역을 돌며 선충 채집에 열을 올렸어요. 동네마다 큰 감나무 하나둘씩은 있는 게 한국 아니겠어요? 집 근처에 있던 감나무를 뒤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썩은 감을 줍고, 어디 놀러가면 근처 공원 들러서 썩은 감을 줍고, 연구실 사람들이 명절에 고향에 간다고 하면 썩은 감 좀 주워다달라고 부탁하기도 하면서 전국의 선충을 모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섭외해주신 사과밭에 가서도 선충을 왕창 줍기도 했습니다. 휴가 쓰고 간 제주도에서 며칠 동안 썩은 귤만 주우러 다니기도 했고요. 그렇게 다양한 선충을 모았고, 연구실에서 키우면서 잘 자라는 선충들만 추려냈어요. 그리고 그 유전체 지도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유전체 지도를 만들려고 염기서열해독을 진행했고, 그리고 원래 늘 하던 것처럼 텔로미어(telomere) 지역이 잘 만들어졌나 확인하는 스크립트를 돌렸습니다. (저는 주로 컴퓨터로 일을 합니다) 선충의 텔로미어는 TTAGGC라는 서열이 수십 개 이상 반복되는 구조이다 보니 컴퓨터로 분석해서 텔로미어가 잘 만들어졌는지, 유전체 지도가 잘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는 게 가능하거든요. 보통은 선충의 염색체 수와 비례해서 10개 정도의 텔로미어가 확인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채집하고 분석한 선충 네 종 중 두 종에서만 텔로미어가 확인되고, 나머지 두 종에서는 텔로미어가 단 하나도 안 나왔습니다.
"조졌네?"
이런 상황에서 욕이 안 나오는 성인군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저는 성인군자랑은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라 머리를 쥐어뜯고, 설탕이 듬뿍 담긴 초콜릿 가루를 세 숟가락쯤 때려넣은 핫초코가 없이는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졸업할 때쯤 20 kg 찜… 다들 조심하십쇼). 핫초코를 뱃속에 들이부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다른 지표만 보면 유전체 지도 품질이 좋은 게 확실한데 텔로미어가 안 나온다? 이건 데이터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다' 저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고, 수억 염기쌍 정보를 담고 있던 파일에 있던 정보를 추려내 눈으로, 수동으로 싹 다 뒤졌습니다. 텔로미어는 반드시 DNA의 끝에 있어야만 하니, 반복서열을 찾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러곤 그 두 선충의 DNA 끝에 있는 반복서열을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정말 신기하게도, 이 두 선충은 기존에 알려져 있던 TTAGGC라는 반복서열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TTAGAC라는, DNA가 딱 하나가 다른 반복서열을 텔로미어 구성요소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텔로미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유전자에 생겼을 단 하나의 돌연변이가 텔로미어의 반복서열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었습니다. 선충, 정확히는 선형동물에서는 단 한번도 보고된 적이 없었던 사례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선형동물은 TTAGGC라는 반복서열을 지닌다는 게 상식이었거든요. 그게 확인되자마자 다시 한 번 시원하게 외쳤습니다. 논문 진짜 쉽게 나갈 거 같다고 말이죠.
그래서 1저자인 임지선 바로 붙잡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크, 위대하신 지선 씨, 날로 먹게 생겼습니다. 텔로미어 진화 논문으로 하나 내시죠." 그래서 기존에 보고된 선충 중에 품질이 안 좋더라도 유전체 지도가 보고는 되어있던 선충 100개를 지선 씨가 골랐고, 저는 이 선충들을 대상으로 텔로미어 분석하는 스크립트를 짜서 돌렸습니다. 지선 씨는 제가 전달 드린 데이터를 보고는 추가 분석할 수 있는 온갖 코드를 다 짜서 분석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텔로미어를 구성하는 반복서열이 바뀐 사례가 선형동물에서 적어도 세 번은 일어났다는 걸 확인하게 됐습니다. (논문에는 마치 처음부터 텔로미어 진화를 연구하고 싶어서 선형동물을 싹 다 뒤진 다음 그중 몇 개를 고품질 자료로 검증한 것처럼 썼지만, 실제 연구 순서는 반대로 했습니다.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요 깔깔)
저희가 제작한 고품질 유전체 지도도 다시 한 번 자세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텔로미어가 바뀌었다는 걸 보고하는 수준을 넘어서,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유추해야만 더 좋은 논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지선 씨에게 텔로미어 손상과 회복 흔적이 있다면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으니 이를 반영하는 특징을 살펴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한 대로 나왔어요(…). 이럴 수가 있나? 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도 한번 봐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그냥 생각한 대로 나왔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운이 좋았다니까요. 대체 뭐였나 싶습니다.
덕분에 논문 편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이준호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선생님께서는 이런 진화가 일어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전문가를 만나셨습니다. 그러곤 이 선충들의 텔로미어 결합 단백질이 TTAGGC와 TTAGAC에 있는 G나 A나 구별 못해서, 안 해서 이런 진화가 더 쉽게 일어난 게 아니겠냐는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그리곤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2. 연구를 진행했던 소속기관 또는 연구소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연구는 서울대학교 기초과학연구원(RIBS; IBS랑 다름)에 소속돼있을 때 본격적으로 진행했고, 충남대학교 생명정보융합학과로 옮겨서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둘 다 정말 좋은 곳이에요. 충남대학교는 특히 마음에 듭니다. 조경이 정말 잘돼 있어서 꽃과 나무가 아름답게 꾸며진 평지(!)를 걷고 있으면 참 기분이 좋거든요. 언제든 대전 놀러오실 일이 있다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3. 연구 활동 하시면서 평소 느끼신 점 또는 자부심, 보람
좋은 사람들 덕분에 마무리할 수 있었단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준호 선생님이야 말할 것도 없이 감사한 분입니다. 연구실에서 하던 일도 아닌데 이만큼 지원해주시고, 박사후연구원에게 교신저자를 주실 수 있는 분이 한국에 얼마나 계실까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지도해주신 덕분에 좋은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 배운 만큼 저도 훌륭한 교수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연구실에서 같이 고생하던 대학원생과 박사님들도 정말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썩은 과일을 주워다주기도 하고, 야생에서 주워온 벌레들을 보관할 인큐베이터를 따로 배려해주기도 했거든요. 이런 배려가 없었다면 연구 본격적으로 하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게다가 결정적으로 제가 하고 있는 연구가 재밌다고 해주는 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는 김천아 박사님께는 특히 더 감사를 전합니다. 새로운 모델생물 개발이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될 거라는 의견을 주시고, 제가 텔로미어 손상과 회복에 대해 전문성을 갖출 수 있도록 공부를 도와주시고, 유전체 지도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연구실에 기반을 닦아주신 분이거든요. 앞으로도 윈윈하며 좋은 연구 오래할 수 있길 바랍니다.
4. 이 분야로 진학하려는 후배들 또는 유학준비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 주신다면?
유전체 연구는 정말 활발한 분야이고, 컴퓨터를 이용해 빅데이터를 처리하기도 아주 용이한 분야이기도 합니다. 자료도 준비해뒀으니 관심 있으시면 공부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https://github.com/JunKimCNU/JunKimLabTutorial/
5. 연구 활동과 관련된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이번 연구가 채집했던 선충 연구의 끝은 아니고요, 적어도 하나 정도 더 좋은 논문 노리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텔로미어를 포함한 다양한 DNA 손상과 회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암세포를 대상으로 더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두 연구 모두 조만간 논문 나오길 바라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한빛사에 소개되길 기대해보겠습니다.
6. 다른 하시고 싶은 이야기들.....
저는 연구 참 즐겁게 했고, 지금도 정말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힘들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대학원생 때는 6일은 12시간씩 일한 다음 7일째에는 6시간 정도 일했고, 지금도 주중에는 12시간씩 일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지만 재밌어서 하고 있어요. 몸이 축나긴 하지만 즐겁긴 하거든요. 모쪼록 다들 몸 건강히, 즐겁게 연구하시길 바랍니다.
* 본 글은 BRIC 한빛사 인터뷰로 김준 님의 동의를 받고 숲사이에 공유합니다. (원문보기)
=> 인터뷰 하편 보기
#숲사이과학기술인인터뷰 #숲사이에서만난과기인
김 준 (충남대 교수 생명시스템과학대학)
1. 논문관련 분야의 소개, 동향, 전망을 설명, 연구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
Genome Res., Nov 02 2023, gr.278124.123 | https://doi.org/10.1101/gr.278124.123
Telomeric repeat evolution in the phylum Nematoda revealed by high-quality genome assemblies and subtelomere structures
이 연구는 신림동 꼭대기쪽 자취방 뒤에 있던 감나무에서 시작됐습니다. 저는 존경해마지 않는 이준호 선생님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했는데, 그때 연구실에서 키우던 예쁜꼬마선충 말고 다른 새로운 야생 선충을 다양하게 채집하고 싶었거든요. 이런 야생 선충을 새로운 모델생물을 개발하고 싶단 생각을 했던 겁니다. 예쁜꼬마선충 말고도 새롭고 신기한 선충들이 많을 텐데, 이런 걸 연구하면 더 재밌는 연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곧장 채집하러 나갔습니다. 마침 자취하던 방이 산 꼭대기에 있었고(월세가 쌌습니다), 뒤쪽에 바로 감나무가 있었는데요, 감을 따질 않고 그대로 두니 가을쯤 되면 바닥이 온통 썩은 감 천지였어요. 선충 중 일부는 이렇게 썩은 과일에서 살고 있는 미생물을 먹고 살기 때문에, 썩은 감 주워가면 진짜 선충이 살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바로 퇴근하면서 연구실에서 50 mL짜리 플라스틱 통(conical tube)을 몇 개 주섬주섬 챙겼고, 다음날 일어나서 출근하는 길에 썩은 감을 몇 개 주웠습니다. 냄새가 엄청나긴 하더라고요. 코 쥐어 막고는 썩은 감에 물을 대충 붓고 섞은 뒤 현미경에서 관찰했습니다. 그 작은 썩은 감 하나에 놀랄 정도로 많은 선충이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 연구 시작할 때는 이러한 선충들의 유전체 지도를 잔뜩 만들어서 그걸로 논문 하나 크게 내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논문 방향이 많이 달랐습니다. 선충 채집을 시작할 즈음만 해도 롱리드 시퀀싱(long-read sequencing)이라는 기법으로 다양한 생물의 유전체 지도를 제작하는 연구들이 정말 좋은 학술지에 계속 실리고 있었던 시점이거든요. 때마침 기술도 발전해 품질도 좋아지고 금액도 저렴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살고 있는 이 선충들의 DNA를 잘 뽑고, 유전체 지도를 만들고, 그걸 잔뜩 모아서 새로운 모델생물의 유전체 지도라는 자원을 공개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준호 선생님께서 이런 제 생각을 정말 많이 지지해주셨습니다. 사실 이준호 선생님 연구실은 예쁜꼬마선충으로 다양한 유전학을 하는 연구실이지, 야생 선충 채집하고 분석하는 그런 연구를 주로 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연구실 선배들이 사과밭 가서 채집하는 일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제가 연구실 들어간 뒤로는 그 일이 주요 연구 분야는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께서 정말 많은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유전체 지도를 작성할 수 있는 연구비를 제공해주시고, 이런 일을 제 주요 연구로 진행할 수 있도록 신경 써주셨거든요. 게다가 사과밭도 섭외해주시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겁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다양한 지역을 돌며 선충 채집에 열을 올렸어요. 동네마다 큰 감나무 하나둘씩은 있는 게 한국 아니겠어요? 집 근처에 있던 감나무를 뒤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썩은 감을 줍고, 어디 놀러가면 근처 공원 들러서 썩은 감을 줍고, 연구실 사람들이 명절에 고향에 간다고 하면 썩은 감 좀 주워다달라고 부탁하기도 하면서 전국의 선충을 모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섭외해주신 사과밭에 가서도 선충을 왕창 줍기도 했습니다. 휴가 쓰고 간 제주도에서 며칠 동안 썩은 귤만 주우러 다니기도 했고요. 그렇게 다양한 선충을 모았고, 연구실에서 키우면서 잘 자라는 선충들만 추려냈어요. 그리고 그 유전체 지도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유전체 지도를 만들려고 염기서열해독을 진행했고, 그리고 원래 늘 하던 것처럼 텔로미어(telomere) 지역이 잘 만들어졌나 확인하는 스크립트를 돌렸습니다. (저는 주로 컴퓨터로 일을 합니다) 선충의 텔로미어는 TTAGGC라는 서열이 수십 개 이상 반복되는 구조이다 보니 컴퓨터로 분석해서 텔로미어가 잘 만들어졌는지, 유전체 지도가 잘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는 게 가능하거든요. 보통은 선충의 염색체 수와 비례해서 10개 정도의 텔로미어가 확인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채집하고 분석한 선충 네 종 중 두 종에서만 텔로미어가 확인되고, 나머지 두 종에서는 텔로미어가 단 하나도 안 나왔습니다.
"조졌네?"
이런 상황에서 욕이 안 나오는 성인군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저는 성인군자랑은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라 머리를 쥐어뜯고, 설탕이 듬뿍 담긴 초콜릿 가루를 세 숟가락쯤 때려넣은 핫초코가 없이는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졸업할 때쯤 20 kg 찜… 다들 조심하십쇼). 핫초코를 뱃속에 들이부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다른 지표만 보면 유전체 지도 품질이 좋은 게 확실한데 텔로미어가 안 나온다? 이건 데이터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다' 저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고, 수억 염기쌍 정보를 담고 있던 파일에 있던 정보를 추려내 눈으로, 수동으로 싹 다 뒤졌습니다. 텔로미어는 반드시 DNA의 끝에 있어야만 하니, 반복서열을 찾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러곤 그 두 선충의 DNA 끝에 있는 반복서열을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정말 신기하게도, 이 두 선충은 기존에 알려져 있던 TTAGGC라는 반복서열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TTAGAC라는, DNA가 딱 하나가 다른 반복서열을 텔로미어 구성요소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텔로미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유전자에 생겼을 단 하나의 돌연변이가 텔로미어의 반복서열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었습니다. 선충, 정확히는 선형동물에서는 단 한번도 보고된 적이 없었던 사례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선형동물은 TTAGGC라는 반복서열을 지닌다는 게 상식이었거든요. 그게 확인되자마자 다시 한 번 시원하게 외쳤습니다. 논문 진짜 쉽게 나갈 거 같다고 말이죠.
그래서 1저자인 임지선 바로 붙잡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크, 위대하신 지선 씨, 날로 먹게 생겼습니다. 텔로미어 진화 논문으로 하나 내시죠." 그래서 기존에 보고된 선충 중에 품질이 안 좋더라도 유전체 지도가 보고는 되어있던 선충 100개를 지선 씨가 골랐고, 저는 이 선충들을 대상으로 텔로미어 분석하는 스크립트를 짜서 돌렸습니다. 지선 씨는 제가 전달 드린 데이터를 보고는 추가 분석할 수 있는 온갖 코드를 다 짜서 분석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텔로미어를 구성하는 반복서열이 바뀐 사례가 선형동물에서 적어도 세 번은 일어났다는 걸 확인하게 됐습니다. (논문에는 마치 처음부터 텔로미어 진화를 연구하고 싶어서 선형동물을 싹 다 뒤진 다음 그중 몇 개를 고품질 자료로 검증한 것처럼 썼지만, 실제 연구 순서는 반대로 했습니다.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요 깔깔)
저희가 제작한 고품질 유전체 지도도 다시 한 번 자세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텔로미어가 바뀌었다는 걸 보고하는 수준을 넘어서,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유추해야만 더 좋은 논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지선 씨에게 텔로미어 손상과 회복 흔적이 있다면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으니 이를 반영하는 특징을 살펴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한 대로 나왔어요(…). 이럴 수가 있나? 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도 한번 봐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그냥 생각한 대로 나왔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운이 좋았다니까요. 대체 뭐였나 싶습니다.
덕분에 논문 편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이준호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선생님께서는 이런 진화가 일어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전문가를 만나셨습니다. 그러곤 이 선충들의 텔로미어 결합 단백질이 TTAGGC와 TTAGAC에 있는 G나 A나 구별 못해서, 안 해서 이런 진화가 더 쉽게 일어난 게 아니겠냐는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그리곤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2. 연구를 진행했던 소속기관 또는 연구소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연구는 서울대학교 기초과학연구원(RIBS; IBS랑 다름)에 소속돼있을 때 본격적으로 진행했고, 충남대학교 생명정보융합학과로 옮겨서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둘 다 정말 좋은 곳이에요. 충남대학교는 특히 마음에 듭니다. 조경이 정말 잘돼 있어서 꽃과 나무가 아름답게 꾸며진 평지(!)를 걷고 있으면 참 기분이 좋거든요. 언제든 대전 놀러오실 일이 있다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3. 연구 활동 하시면서 평소 느끼신 점 또는 자부심, 보람
좋은 사람들 덕분에 마무리할 수 있었단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준호 선생님이야 말할 것도 없이 감사한 분입니다. 연구실에서 하던 일도 아닌데 이만큼 지원해주시고, 박사후연구원에게 교신저자를 주실 수 있는 분이 한국에 얼마나 계실까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지도해주신 덕분에 좋은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 배운 만큼 저도 훌륭한 교수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연구실에서 같이 고생하던 대학원생과 박사님들도 정말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썩은 과일을 주워다주기도 하고, 야생에서 주워온 벌레들을 보관할 인큐베이터를 따로 배려해주기도 했거든요. 이런 배려가 없었다면 연구 본격적으로 하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게다가 결정적으로 제가 하고 있는 연구가 재밌다고 해주는 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는 김천아 박사님께는 특히 더 감사를 전합니다. 새로운 모델생물 개발이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될 거라는 의견을 주시고, 제가 텔로미어 손상과 회복에 대해 전문성을 갖출 수 있도록 공부를 도와주시고, 유전체 지도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연구실에 기반을 닦아주신 분이거든요. 앞으로도 윈윈하며 좋은 연구 오래할 수 있길 바랍니다.
4. 이 분야로 진학하려는 후배들 또는 유학준비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 주신다면?
유전체 연구는 정말 활발한 분야이고, 컴퓨터를 이용해 빅데이터를 처리하기도 아주 용이한 분야이기도 합니다. 자료도 준비해뒀으니 관심 있으시면 공부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https://github.com/JunKimCNU/JunKimLabTutorial/
5. 연구 활동과 관련된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이번 연구가 채집했던 선충 연구의 끝은 아니고요, 적어도 하나 정도 더 좋은 논문 노리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텔로미어를 포함한 다양한 DNA 손상과 회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암세포를 대상으로 더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두 연구 모두 조만간 논문 나오길 바라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한빛사에 소개되길 기대해보겠습니다.
6. 다른 하시고 싶은 이야기들.....
저는 연구 참 즐겁게 했고, 지금도 정말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힘들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대학원생 때는 6일은 12시간씩 일한 다음 7일째에는 6시간 정도 일했고, 지금도 주중에는 12시간씩 일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지만 재밌어서 하고 있어요. 몸이 축나긴 하지만 즐겁긴 하거든요. 모쪼록 다들 몸 건강히, 즐겁게 연구하시길 바랍니다.
* 본 글은 BRIC 한빛사 인터뷰로 김준 님의 동의를 받고 숲사이에 공유합니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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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사이과학기술인인터뷰 #숲사이에서만난과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