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ESC와 함께하는 과학산책] 너그러운 옹기의 과학 이야기

김기명
2023-03-07


@삽화 김기명


[ESC와 함께하는 과학산책]  너그러운 옹기의 과학 이야기


옹기와의 조우

몇 푼 되지 않던 항아리 값이 전국적으로 가격이 급상승되었다. 거들떠보지 않던 항아리, 질그릇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문화부에서 주관한 옹기 전시회 덕분이었다. 전시회는 1991년에 덕수궁에서 열렸고 당시 5,000여 점의 옹기들이 전국에서 수거되었다. 궁이라는 최상위 계급의 터전에 민중의 항아리가 전시된다는 자체가 기발한 발상이었다. 박사학위 주제를 발효로 정한 나에게는 한국의 전통 발효와 깊은 관계가 있는 옹기를 접할 좋은 기회라 생각했고, 잠시 전시회 업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일 연구실에서 논문이나 뒤적거리고 실험하는 나에게는 버겁게도 예상과 다르게 육체적 노동을 꽤 했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옹기를 수거하느라 준비하는 일 년 동안 전국 방방곡을 돌아다녔다, 덕수궁 내의 오래된 돌다리 등이 훼손될까 봐 트럭이 못 들어온다고 하여, 뒷문부터 싣고 온 큰 독들을 회랑까지 조심스럽게 새벽 내내 굴렸던 기억이 새롭다.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너그러움

항아리에 대한 실험 논문은 아쉽게도 많지는 않다. 그러나 몇몇 논문에서 찾은 연구 결과를 보면 황토 항아리, 질항아리, 도자기의 열전도도는 각각 0.132, 0.311, 그리고 0.293 W/m·K으로 옹기는 다른 도기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열전도도 값을 보인다. 이 이유는 옹기가 가마 온도 800℃ 이상에서 토질과 결합된 결정수가 고열에 사라지며 1200℃에 도달하면 남은 토질들은 재결정이 형성되어 미세기공이 생성된다. 1300℃에서 기공이 급격하게 커진다. 그런데 아무리 커봤자 이 미세 세공은 산소보다 크고 물방울보다 작다. 따라서 옹기는 열전도의 흐름이 전도와 대류가 반복되어 치밀한 재료보다 열전달 속도가 느리게 된다. 즉, 한 번에 열이 들어오기도 어렵고 한번 품은 온도는 쉽게 잃지 않는다. 이 세밀한 공극의 탄생은 옹기의 기체 투과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청자와 백자는 기체가 투과되지 않으나, 옹기는 1,300℃의 소성 온도로 만든 시편이 1분 만에 완전히 기체를 투과시킨다는 보고가 있다. 청자와 백자 같은 도자기는 치밀하고 매우 작은 입자의 점토로 이루어져 미세 기공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적 발효는 그 발효식품의 품질을 지배하는 특정 미생물들이 우점종이어야 한다. 미생물 역시 사람처럼 에너지원으로 탄소를 연소하고 생체 에너지인 ATP를 만드는데 미생물은 이 과정을 위한 생육조건이 까탈스럽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온도와 산소다. 온도는 당연히 꾸준한 일정 온도를 유지해야 하며, 너무 높으면 미생물들은 죽어버리고, 너무 낮으면 생육이 정지된다. 발효를 위한 환경조건에서 산소는 너무 많으면 미생물들이 크기만 왕성하게 커지고 우리가 원하는 유기산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즉 발효의 독특한 신맛이 없어진다. 따라서 산소가 풍부하지 않은 조건에서 미생물들의 삶을 약간 고되게 해주면 신맛이나 알코올 등이 나오게 되어 우리가 원하는 맛이 난다. 그렇다고 산소를 완전히 제거하면 미생물들은 모두 죽어버리게 된다. 발효에 관여하는 미생물은 곰팡이, 효모, 세균 등 다양하지만 온도가 너무 높거나 낮거나 산소가 너무 많거나 적으면 편중적으로 특정 미생물만 살아남게 되어 원치 않은 미생물이 우점종으로 남을 수 있다. 따라서 좋은 발효가 되기 위해 편차가 심하지 않은 온도와 적절한 산소가 필요하다. 이런 어려운 조건을 바로 옹기가 해낸 것이다. 옹기는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온도와 산소조건을 베푼다. 훌륭한 발효식품은 옹기의 너그러움의 산물이다. 


사투리 쓰는 항아리

어느 날 회랑 벽에 도별로 세워놓은 독을 보니, 모양이 지방별로 차이가 있어 보였다. 독의 밑지름, 측면 굴곡점 위치, 높이, 입구 지름을 측정해보니 신기하게 지방별 평균값이 유의미한 차이를 보였다. 경기도 독은 입과 밑지름이 거의 같고 늘씬하며, 충청도 독은 목이 높고 수치의 중심값을 가지고 있다. 강원도 독은 입 지름 크다. 경상도 독은 입구와 키가 작고 낮다. 전라도 독은 어깨도 키도 크다. 언제나 온화한 기후를 형성하는 경상도 독은 대량 발효는 독 내의 온도가 높아 실패할 확률이 크기 때문에 소량 발효를 위해 크기가 아담하고, 사계절이 뚜렷한 전라도의 경우는 대량 발효가 가능했기 때문에 독이 큰 것이다. 당연히 강원도 독은 춥고 낮은 일조량 때문에 입의 크기가 크다. 그래서일까, 가끔 쉬는 시간에 지방별로 모아놓은 독을 보며 ‘독멍’을 때릴 때면, 독들이 사투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착각이 종종 들었다. 각 지방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아웅다웅 싸우기도 하고 자기 고향 장맛이 최고라고 우기기도 하고 자기들이 만든 막걸리를 서로 나눠 마시기도 하는 모습이다.


옹기는 과학

이제 도시에서 옹기의 발자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마치 문명의 발 빠른 움직임에 쉽게 잊혀 가는 건 옹기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김치는 김치냉장고가 대체하고 있고 가공이 완료된 장들은 마켓에 다양하게 깔리고 있다. 물론 움직이기도 힘들고 다루기 버거운 독이 문명의 커튼 뒤로 차마 은퇴식도 못 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은 광속 같은 시대의 흐름 때문이다. 한 번 품은 온도는 끝까지 품으려고 하는 뚝배기 같은 정서는 하루하루 모양을 바꾸고 변절까지 일삼는 요즘 세태엔 잃어가긴 너무 슬픈 유산이다. 옹기의 특성을 이용해 빵 용기 (bread box), 신선 과일 및 채소 보관 용기 등 우리 실생활에 재탄생 될 수 있는 여지도 많고 관련 연구도 꽤 많다. 은은한 빛깔의 옹기로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재탄생되어 버젓이 주방의 한자리를 옹기가 꿰차면 참 좋겠다. 우리가 안녕하며 멀리 보내기엔 옹기는 오랜 기간 우리의 식문화와 생활문화에 주연 같은 조연으로 민중과 함께해온, 잊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과학이기 때문이다. 


김기명 전 호남대 교수, 식품공학
김기명 (전 호남대 교수, 식품공학)


내일신문과 ESC가 함께 과학칼럼 코너를 신설해 2023년 새해부터 매주 화요일 '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갑니다. ESC 회원 과학자 칼럼니스트들의 맛깔난 '우리를 둘러싼 과학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사원문 링크

#ESC와함께하는과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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