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숲터뷰 #5 실패하지 않는 좋은 사람, 진화생물학자 이대한

관리자
2024-04-16

🌱 숲터뷰란?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에서 운영하는 과학기술인커뮤니티 ‘숲사이’에서  진행하는 인터뷰, 이를  '숲터뷰'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만들었습니다. ‘숲터뷰’는 과학기술을 통해 우리 사회의 새로운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주제를 기획해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 숲터뷰 첫 주제 시리즈는 '실패' 
숲터뷰 시리즈의 첫 번째 주제로 '실패'를 선정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과학기술인들이 겪은 실패 경험을 통해 과학과 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함께 생각해보는 인터뷰입니다.

 #숲터뷰 #숲터뷰_실패 #숲사이에서만난과기인

# 프롤로그

이번 시리즈 주제인 ‘실패’는 뻔한 답변을 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테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같은 답변 말이다. 더군다나 교수에게 이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는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 진화생물학자 이대한 교수가 이렇게 갇힌 주제를 어떻게 색다르게 풀어낼지 궁금해하며 성균관대를 찾았다. ‘퐝아재’로 불리는 이강수 ESC 사무국장도 함께했다. 작은 실패 정도는 기억 속에서 흐려질 것만 같은, 벚꽃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다. 

김재아(소설가, ESC 과학문화위원장)

 
# 실패는 디폴트

우리는 성대 근처 퓨전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전망이 좋은 카페로 이동했다. 카페에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매장엔 편안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Q. 팟캐스트를 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요즘도 팟캐스트를 추구하시나요?

여전히 팟캐스트를 좋아해요. 음성을 다루는 매체가 주는 힘이 있잖아요. 라디오 방송 같은 게 주는 힘이요. 사람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게 되고 그 목소리와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되는 그것만의 고유한 힘이 있는 것 같아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하고 싶어요.

 

Q. 왜 팟캐스트인가요?
과학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논문은 드라이하고 논리적인 글이지만 사실은 논문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전혀 드라이하지 않거든요. 거기에는 사람이 들어있어요 (눈물이 맺힌다. 그의 혼잣말 ‘왜 울컥하지?’ 이강수 국장과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잠시 추스르며.)

젊음이 들어있는 경우도 많고, 즐거운 순간들, 힘든 순간들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팟캐스트에서 나누면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으니까요. 방금 왜 울컥했는지 모르겠어요. 카페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너무 슬픈 음악이어서 그랬나 봐요.


Q. 혹시 자신이 겪었던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뇨, 힘들었던 순간보다 오히려 즐거웠던 추억이 떠올라서 울컥했던 것 같아요. 노래가 그런 작용이 있죠. 저는 대학원 생활 즐겁게 잘했거든요. 그래서 이 인터뷰 섭외를 받고도 인터뷰 주제에 적합하지 않은 삶을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거절하려 했어요.

왜냐면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잖아요. 처절하게 실패하고,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그런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처럼 힘들었던 것보다는 즐거웠던 순간들이 더 많이 떠오르고, 하고 싶은 거를 재미있게 하면서 운 좋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는 게 이 길을 걷고 싶지만 주저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응했어요.

 

Q. 운이 좋다고 하셨지만 교수님 칼럼을 읽어 보니까 ‘실패를 디폴트(기본값)으로 생각한다’라고 쓰셨더라고요. 그래서 남들과 좀 다르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남들은 실패하면 그 상황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겠지만 교수님은 그 안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실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인상 깊게 들었던 말씀이 있어요. 이대한 교수님 스승인 서울대 이준호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나의 연구는 일 년 365일 중에 364일이 실패고 하루 성공인데 그 하루 때문에 1년을 사는 거다.’ 그런 게 실험 연구자들의 삶인 건가 싶어서 인상 깊었어요.
스승님의 숨겨진 메시지는 한 번의 성공이 대박이라서 나머지 실패가 다 치유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실패에 익숙해지고 실패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야지만 실패하는 날이 364일이더라도 견딜 수가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만약에 모든 날이 너무 절망스러우면 그 한 번의 성공이 어떻게 위로가 될까요?

누구나 실패 혹은 거절을 당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잖아요.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겪다 보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돼요. 도망치거나, 도를 트거나. 실패가 싫은 이유는 실패가 고통스럽기 때문인데, 실패와 고통을 분리시키는 작업을 하는 게 연구자들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구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약간은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고 불안도도 좀 높은 편이에요. 그래서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요. 과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절대 벌어지지 말아야 할 리스크들은 제거를 하려는 편이에요.

실험을 할 때에도 최악의 상황 이를 테면 꽝이 되고, 돈을 날리고 이런 상황을 가정해놓고 실험을 시작하죠. 그럼 실패를 했을 때 ‘일어날 일이 일어났구나’ 그러죠. 중요한 것은 왜 실패했을까?를 찾는 즉, ‘트러블 슈팅’이라고 하는 과정이에요. ‘트러블 슈팅’을 잘하느냐 잘못하느냐가 사실은 뛰어난 과학자냐, 아니냐를 가리는 핵심 능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포기할 때는 빠르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돼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닌가를 빠르게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죠. 어떤 사람들은 너무 빠르게 포기하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오래 집착을 해요.

Q. 비슷한 사례를 겪으신 적 있나요?
제가 박사 과정 때 했던 프로젝트가 한 1~2년 동안 진도가 하나도 안 나갔어요. 보통 과학의 힘을 말할 때 포퍼가 말한 ‘반증주의’를 들잖아요. 그런데 ‘반증주의’에 문제가 있어요. 무엇인가 반증됐을 때 실제로 반증된 게 무엇인지 찾아내기가 힘들거든요. 실험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가정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제가 박사 과정 때 어떤 행동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찾으려고 했어요. 근데 DNA에 돌연변이를 다 만들어서 테스트해봤는데 영향이 없는 거예요. 실험이 계속 안 되어서 그 당시에 이제 막 갓 나온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 써서도 해보고, 돈도 많이 들이고 시간도 많이 들였지만 그래도 잘 안 돼서 힘들었어요. 여러 가지 시도를 하다가 단백질이 아닌 RNA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결국 논문을 내긴 했는데 그때 좀 힘들었죠.


# 돌고 돌아 제자리에 왔지만 난 달라졌다

Q. 민족사관고를 나와서 서울대 진학하고 미국 노스 웨스턴 대학교와 스위스 로잔대학교에서 연구를 이어나가신 걸 보면은 겉으로는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진화생물학을 선택하기까진 학문적 여정으론 방황이 있었나 봐요.
돌이켜보면 큰 원을 그린 셈이죠.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제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하고 싶었던 연구에요. 그때에도 ‘신경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연구를 해야할지 몰라서 당시 진학한 연구실에서 최대한 연관된 주제의 연구를 진행하였어요. 대학원에 입학한 지 14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때와 같은 질문으로 돌아왔지만, 그 질문을 던지는 저는 성장한 과학자가 되었죠.

 

Q. 신경계 진화엔 왜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고민을 했죠. 나라고 하는 이 존재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는지 나의 정신 즉 자아에 좀 더 관심이 있었고요. 물질적인 관점에서 이런 정신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결국 나의 뇌를 비롯한 신경계인데 이 신경계가 어떻게 생겨났을까라는 문제를. 이런 고민은 제가 사춘기 때 처음하게 되었거든요. 그때 까뮈나 사르트르를 읽으면서 고민을 해나갔는데 그런 고민이 과학적인 옷을 입은 거죠.


Q. 중학교 때 그런 책을 읽다니요.
저희 부모님이 국문과 CC세요. 그래서 집에 책이 많았고, 전집 같은 것들도 많았죠. 그런 책들에 인류 지성의 축적이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문제를 궁금해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뇌 진화 신경계의 기원에 관심을 가졌어요.

 

Q. 신경계 진화 연구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지나오셨나요?

서울대 이준호 교수님이 저는 너무 좋고, 그 연구실에 있는 선배들도 너무 좋았어요. 일단 대학원을 이준호 교수님 연구실로 진학하고 거기서 이쪽과 관련된 연구를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예쁜꼬마선충의 행동을 통해 진화 연구를 하며 다가갔죠.

거기에서 되게 저명한 학자 그룹과 공동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저랑 같이 공동 연구를 하던 미국 포스닥(박사후연구원)이 노스웨스턴대학교 교수가 된 거예요. 그가 랩을 차리면서 저를 리크루트해서 거기서 박사후연구원이 되었죠. 포스닥 때 DNA 시퀀싱(해독)이 활발하게 일어날 때라 연구기법을 배워가며 연구했어요.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첫째가 태어나고 좀 힘들었어요.

갑자기 인생사적인 전환을 맞았죠. 원래 포스닥 시기가 되게 스트레스가 많은 시기이기도 하잖아요. 왜냐면 포스닥은 어쨌든 임시 계약직이니, 자리를 잡아야 되는 상황이니까 좋은 결과를 내야 하는데 아이가 태어나니까 물리적인 시간이 줄어들잖아요. 전보다 생산성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느낌이 들었어요. 마음은 급한데 몸은 안 따라주고 스트레스는 더 많이 받고... 그래서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그때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생각이 들어서 연구를 그만두려 했어요. 한국에 있는 대기업에 원서를 썼더니 인터뷰 연락이 왔어요. 기분이 좋았어요. ‘지긋지긋한 포스닥 생활 끝내고 이제 한국 돌아가서 나도 그냥 편하게 살자, 가족들도 잘 챙기고 살자’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출근을 하고는 갑자기 기분이 점점 안 좋아졌어요. 분명 인터뷰 연락 받고 아침에는 기분이 좋았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이 일을 좋아하고, 연구를 좋아하고, 지금 못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만둬야 되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좀 억울했죠. 이런 마음으로 그만두면 안되겠더라고요.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내가 진짜로 해보고 싶은 연구를 후회없이 해보고 그만둬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그런 연구인가?’라는 걸 좀 진지하게 물어봤을 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신경계와 관련된 진화 연구를 하긴 했는데 제가 생각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때가 2019년이었어요.

‘후회 없이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연구를 한 번 더 해보자’ 그런 생각으로 세컨포스닥(두 번째 박사후과정)을 하게 되었죠. 당시 미국 보스가 저를 많이 붙잡았고, 제게도 굉장히 리스크가 큰 결정이었어요. 하지만 그전에는 뭘 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몰랐는데 이제 박사도 하고, 포스닥도 해보면서 기술도 생기고 지식도 생기니까 뭔가 좀 보이는 거예요. 말하자면 산을 높이 올라오니까 어디로 올라가서 어디에다 돌을 쌓아야 되는지 보이는 거죠. 그때 우연하게 트위터에 들어갔어요. 제가 트위터를 잘 안 하거든요. 트위터에서 제가 생각하던 그 연구를 가지고 스위스 로잔대학교에서 포스닥을 뽑는다는 광고를 본 거예요. ‘스위스는 또 새로운 경험이 되겠네’라는 생각이 들었죠.


Q. 보통 새로운 나라에 가는 걸 두려워할 텐데요.

저는 <먼나라 이웃나라>의 만화를 되게 좋아했었거든요. 정말 마르고 닳도록 읽었는데 거기서 제일 좋아하는 편이 스위스였어요. (모두 웃음) 그래도 아이도 생겼고, 국제 이사를 하려면 아내가 힘드니까 ‘이 나라가 진짜로 좋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하고 1차 인터뷰 합격 후 방문했죠.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거예요.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도 미국보다 더 행복하고, 더 여유 있어 보였고요. 스위스란 나라도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서 갔죠.

<김재아, 이대한, 이강수(퐝아재 얼굴이 크게 나온 것은 원근감이라 주장한다.)>

 

Q. 포스닥을 하시면서 <네이처 생태 및 진화> 등 이 분야 최고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기도 하셨잖아요. 세컨포스닥 끝난 후 한국과 외국 중에 고민했을 것 같아요. 한국에 온 후 후회한 적은 없나요?
저는 기본적으로 후회는 안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신중하게 고민해서 결정하면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다만 세컨포스닥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제가 2년 반 조금 안 되게 하고 왔거든요. 그 부분이 아쉬웠죠. 더 길게 하지 못해서. 처음부터 스위스에서 시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Q. 돌고 돌아 원래 하고자 했던 질문을 위한 연구자가 되셨어요. 그렇게 헤맨 과정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나요?
제가 대학원에 입학할 때 제일 처음 생각했던 연구 주제를 이제야 본격적으로 제 연구실에서 하고 있는 기분이거든요. 뭔가 같은 자리로 돌아왔는데 저라는 사람이 달라진 느낌이 되게 강한 것 같아요. 마치 나선 계단을 올라가는 느낌. 위에서 보면 계속 같은 데를 맴도는 것 같지만 올라가는 거잖아요. 그런 느낌이죠.


# 고등학생 이대한에게 선사하는 축적의 산

Q. 지난해 책 <인간은 왜 인간이고 초파리는 왜 초파리인가>를 내셨지요.

네, 제가 읽고 싶은 책을 썼어요. 고등학생 이대한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요. 제가 고등학교 땐 제가 갖고 있던 질문을 알려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갖던 궁금증을 예전 저에게 들려주고 혹은 미래의 이대한에게 들려준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그런 면에서 출판해 준 바다출판사를 좋아합니다. 이 출판사는 깊이가 있는 좋은 책을 내려고 하는 곳이죠.

요즘은 축적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어요. 뭔가를 축적해 나가는 게 중요한데 우리나라가 축적 문화가 약한 것 같아요. 바다출판사는 오랜 시간 동안 <스켑틱> 같은 좋은 과학잡지도 내고, 양질의 과학책도 펴내면서 축적을 쌓았죠.


<이대한 저, 2023 바다출판>


Q. 저서를 읽어보니 비유가 탁월하더라고요. 제 생각엔 과학자 중에 가장 비유를 잘 쓰는 저자가 아닐까 싶어요. 최근의 진화생물학이 발전한 것을 ‘선사시대를 지나 역사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비유합니다. 유전자의 종합적 특징을 ‘스포츠 단체전’에 비유하고 있고요. 칼럼에서 이 비유도 좋았어요. ‘지구를 뒤덮고 있는 모든 눈부신 생명은 바로 자연 선택이 실패의 무덤으로부터 한 겹 한 겹 쌓아올린 기적의 퇴적층이다.’ 이런 비유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비유를 잘 쓴다는 말을 몇 번 듣기는 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쓰냐라고 물으시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생각했을 때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제게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이공계의 천재들이 가진 능력은 전혀 없는 것 같지만, 언뜻 서로 연관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연관성을 찾아내는 능력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연구를 할 때도 실제로는 되게 다른 분야의 연구인 것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비슷한 원리나 현상 혹은 기작(메커니즘)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연결시키고 이쪽 분야에서 쓰이던 기술을 다른 분야로 가져와서 쓰고 그래요. 저는 인식에서 경계 지음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Q. 아까 시간이 갈수록 축적의 중요성을 느끼신다고 하셨는데 계기가 있나요? 왜냐면 요즘 저도 많이 느끼거든요. 2015년에 서울대 공대 교수님들이 낸 책 제목이 <축적의 시간>이었잖아요? 그때부터 왜 연구자들이 축적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를 고민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도 그 이후로 축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요.

(옆에서 듣던 강수) 축적하니 저도 생각나는 사건이 있어요. 일본에서 황우석 스캔들과 비슷한 사건이 있었죠. 오보카타 사건(만능세포 연구논문 조작 사건)이요. 당시에 한 분이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인지 제게 설명해 주었어요. 학문의 축적이라는 게 밑에서부터 쌓여온 것들이 있고, 그걸 기반으로 또 하나의 연구가 생성되고 이렇게 연결되는 것인데 이런 축적 과정에서 하나의 돌멩이가 빠지게 되면 몇 년 쌓인 학문이 싸그리 무너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서 축적은 오히려 건축보다 더 엄밀하고 섬세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건에 분노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셨죠. 그러니까 혼자만 피해 보는 게 아니고 수많은 관련 연구자들한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야기였어요.

(대한) 사실 과학 연구 꽃은 논문이거든요. 논문은 내재적으로 어떤 축적의 구조를 잘 담고 있어요. 축적 관련하여 시각화한 자료를 본 적이 있어요. 한 편의 논문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 논문이 인용하고 있는 논문들이 쫙 있잖아요. 그 연결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 또 그 논문들을 인용한 논문들이 있을 거고, 그 논문들이 또 연결되어 있을 거고, 이렇게 계속해서 아주 거대한 거꾸로 뒤집힌 나뭇가지처럼 연결돼 있어요. 이 모든 지식들 축적에다 하나의 가지를 뻗는 것 그것이 어떻게 보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제자들을 교육시킬 때도 제일 강조하는 게 논문을 읽는 거거든요. 왜냐면 지금까지 축적된 것들을 받아들여야지만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저는 등산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말하자면 ‘우리는 산을 지어 올리는 사람’인 거예요. 우리 과학자들이 원래 있던 산보다 더 높은 산을 지어 올리는 사람이고, 각자 돌무더기를 지고 올라가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축적된 산들을 다 차곡차곡 밟고 올라가서 정상 위에다가 돌무더기를 더 올려서 산을 더 높이 만드는 거죠. 열심히 남들이 쌓아놓은 산을 올라가야 해요. 그래서 어디까지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우리가 모르는 경계인지 아는 것이 등산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저는 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 학생들이 좀 부러웠던 이유가 우리나라 학생들과는 출발선부터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그 친구들은 축적된 것을 물려받는 거죠. 그들이 물려받는다라고 하는 것이 어떤 족보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고민을 할 때 스승이 한마디 하면서 자신에게 새로운 눈을 트여주거든요. 이것이 케이블카를 타고 가듯 천 미터씩 산의 고도를 올려주는 거거든요.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가장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들이 있으니까, 꼭대기에서 보이는 풍경을 들려줄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축적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게 중요한데 한 번 뒤처지기 시작하면 따라잡기가 쉽지 않죠. 왜냐하면 산들은 계속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높아지거든요. 저도 만약에 축적이 많이 된 연구 전통 속에서 공부했다면 지금 제가 위치한 이 지점에 훨씬 빨리 왔을 것 같아요.

Q. 그런 면에서 아까 고등학생 이대한을 위해 책을 쓰셨다는 의미는 그들이 올라갈 산을 만들어 주신 거네요.
그런 계기가 되는 책이라면 저는 그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아요. 한 10명 정도에게 그런 일을 했다면 저는 제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걔네들이 또 다른 고등학생 자신들에게 책을 써서 10명에게 불리면 되겠지요.


Q. 산을 선물하신 거였네요.

 

Q. 저서를 통해 유전학과 진화생물학 등의 역사에서도 실패 사례가 있고 이를 통해 생명과학이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다윈의 진화론이에요.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에 대한 이해가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죠. 진화란 시간에 따른 생물 집단의 변화로 정의할 수 있는데, 결국 이러한 변화는 유전 변이들의 축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다윈은 정교하고 정확한 유전 이론을 정립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의 저서 <종의 기원>은 저도 읽기가 힘이 들어요. 다윈 스스로가 유전 기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썼기 때문에 설명에 실패하는 부분이 있어요. DNA의 구조가 발견되기 거의 100여 년 전에 출판된 책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요.

이걸 피셔, 홀데인, 라이트와 같은 20세기 초의 학자들이 유전과 진화를 통합하는 ‘신종합’을 달성하면서 진화를 유전자 수준에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졌지요. 하지만 ‘신종합’에도 한계가 있었어요. 그걸 지금 제가 연구하는 ‘이보디보(진화발생생물학)’이 극복했죠. 그런 면에서 실패는  실패라기보다는 한계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개인은 자신의 실패로 여길 수 있겠지만 학문으로 봤을 때 보면 한계였던 거죠. 왜냐하면 학문은 축적이 되니까 그 축적의 시간을 통해서 계속해서 성숙하고 발전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Q. 실패는 한 개인의 실패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학문의 한계일 뿐이었다.

네. 

 

Q.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을 중학생 때부터 하셨던 것 같아요. 답은 어느 정도 나왔나요?

이젠 제가 이 주제를 가지고 꽤 긴 대중 강연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어요. 생명의 시작부터 지금 인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사건들이 무엇이고 그게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큰 윤곽 정도는 그릴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봤을 때 가장 중요하지만 아직 빈 부분은요. 지구에서 생명 진화 초기에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현했는데 그 과정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한 지식이 여전히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20~30년 뒤에는 계속 연구가 축적이 될 테니 우리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부분을 제외하면 지금은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하는 ‘정상 과학의 단계’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대충 판은 나와 있고 퍼즐만 잘 채워 넣으면 완전한 이야기가 나오는 그런 국면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신경계는 진화에 도움이 되었을까?

Q. 신경계 연구를 하시니까 뇌과학자들과도 협업을 많이 하시겠네요.
이 연구가 주류 뇌과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는 아니에요. 저는 반골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 분야에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어요. ‘도대체 신경계가 몇 억 년 전에는 어떻게 생겼을까?’ 혹은 ‘그게 몇 억 년의 시간 혹은 몇 백만 년의 시간 동안 어떻게 변화할까?’ 이런 게 궁금하죠.

Q. 그런 원시 신경계는 어떻게 연구하나요?

최초의 신경계가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 논문이 최근 많이 나오고 있어요. 당시의 진화는 다 바닷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해양 생물들을 살펴봐야 돼요. 진화는 메타적인 학문이에요. 생물학을 처음 배울 때는 지금 현재 존재하는 생물들에 대해 배우게 되죠. 하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생물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 생물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배우는데 이 둘은 다른 내용이거든요. 새로운 방식과 접근이 필요해요.

대략 한 5억 년에서 8억 년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추정되죠. 그때쯤 이미 동물들이 신경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저는 이 궁금증 때문에 원시적이라고 여겨지는 동물들에게 관심이 있어요. 인간에게서 가장 먼 친척들이죠. 요즘 저희 연구실에서는 해파리를 연구하고 있어요.

Q. (강수) 조금 엉뚱한 질문인데 진화적인 측면에서 사실은 신경계가 진화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형태라고 생각을 하시는 걸까요?
제가 신경계 연구에 집중하는 동기는 인간 중심적인 혹은 자기 중심적인 이유라고 생각해요. 신경계의 진화가 진화사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비중 있는 사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라고 하는 종이 생명의 가지에 있는 다른 종들보다 더 우월하거나 더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제가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종과 다른 특질이 신경계에서 나오는 것 같으니까 연구를 하죠.

Q. 커서 자기 뇌를 먹는 멍게 사례를 들어가며, 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맞는 말인가요?
진화적으로 생각하면 되게 간단하죠. 지적인 능력이 높은 사람이 자식을 더 많이 낳아야지만 지능이 높은 방향으로 인류가 진화하거든요. 헌데 그렇지 않을 거거든요.

오히려 저는 지능이 너무 높아진 게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왜냐하면 보통 지적 능력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은 동물들은 정신적인 고통에 그렇게 시달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는 정신이 발달하고 비대해지니까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에 더 시달리잖아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어떤 신경회로의 작용이라고 한다면 물질적인 고통도 그런 회로를 활성화시키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활성화시킬 건데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라는 거는 예를 들어 ‘마감 시간 다가온다’ 같은 건 물리적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그런 관념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때까지 수많은 동물들이 탄생하고 진화하고 멸종했지만 인간처럼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룩한 종이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썩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이 산업화되고 발전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더 행복해졌나요? 오히려 출생률은 더 떨어졌잖아요. 생물로 봤을 때는 출생률 저하는 도태거든요.


Q. 해파리 모델동물(실험에 쓰이는 동물, 대개 성장이 빠르다)은 처음 들어요.

모델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은 생물이긴 하죠. 예쁜꼬마선총이나 초파리에 비해서는. 해파리가 동물 중에서 어떻게 보면 원시적이라고 생각되는 신경계를 가졌어요. 일단 뇌가 없어요. 아마도 초기 동물에 가까운 신경계는 해파리 신경계였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그래서 해파리의 신경계를 이해하면 조금 더 원시적인 신경계가 어떤 상태였을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러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진화를 했는지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해파리를 모델로 쓰죠.

# 꿈을 꾸라는 말은 올드한 말일까?

Q. 교수님은 한국의 대학이나 연구 환경에 대해 기회가 되면 솔직하게 비판도 하고 있어요.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이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향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한국 대학들이 소위 말하는 외국에 있는 좋은 대학이나 기관의 연구소에 비해서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연구를 하는 것을 저는 대학 당국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냐면 대학 재정에 지금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우선순위가 다르게 논의되고 있어요. 대학의 이러한 재정 문제라든가, 연구 환경 이런 문제보다 대학 입시가 국민적인 관심도가 높다 보니까 교육부도 그런 문제에 더 많은 품을 들이는 것 같거든요. 여러 가지 코어퍼실리티(연구 인프라 시설) 설치 같은 부분이라든가 아니면 연구비 관련된 것들은 노력해봤자 국민들에게 별로 티가 안 나는 것처럼 보이니 의제 자체가 안 되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우리 국민에게 ‘우리나라는 과학기술로 먹고 살아야 되는 나라다’라는 인식은 공유되어 있는 것 같아요. 다만 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문제를 방치해 온 시간이 오래 되면 그때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아까 말했던 것처럼 축적 문제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할 거라는 우려가 듭니다.

제가 생각할 때 우리나라 제일 강점은 여전히 ‘사람’인 것 같거든요. 그냥 랜덤하게 대학 교수 한 100명 뽑아가지고 어떻게 개혁해야 되느냐 안 도출해보라고 해도 굉장히 멋있는 안이 나올 거예요. 정말 똑똑하고 인격적으로도 너무 훌륭하신 과학자들이 너무너무 많거든요. 그런 분들의 지혜와 힘을 묶어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가장 부족하다 느끼는 것이 있어요. 더 이상 우리 사회가 꿈꾸지 않는 사회가 된 것이요.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이명박 대통령 때 747 공약이 자주 떠올라요. ‘7% 성장으로, 국민소득 4만불 달성하고, 7위권의 국가로 성장한다!’

그때는 막 얼토당토 않는 소리라고 얘기했고 너무 성장지상주의라고 비판했었죠. 이런 공약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어떤 공동체가 꼭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 좋은 방향 그러니까 자기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들자는 꿈을 꾸고, 구체적인 꿈을 꾸기 위해서 어떠한 것들이 필요한지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를 논의하는 그런 게 요즘 우리에겐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치를 볼 때 너무 답답한 이유도 이제 그런 이야기를 어느 진영도 하지 않고 거의 증오와 진영의 논리만이 너무나도 지배적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스위스에 살 때 스위스 국민에게 질투가 많이 났어요. 우리도 좋은 자연이 있고,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데 왜 이렇게 살지 못하는 거지? 왜 사람들이 다 힘들게 살고, 여유 있게 살지 못하고 각박하게 사는 거지? 제가 봤을 때는 아까 말씀드렸던 그런 꿈을 같이 꾸고, 그 꿈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필요한 실천을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소득이 3~4만 불이 아니라 뭐 7~8만 불 되는 나라가 못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그 꿈을 안 꾸면 절대로 될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부자 나라에 가서 살아보니까 그 부에서 나오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경제 성장을 통해 모멘텀이 생기면 갈등 봉합이 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현재 저출생 문제도 한국이 다문화 국가가 되는 다른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한국 사람들은 변화에 잘 반응하는 편이고 위기에 강한 민족이잖아요.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어떻게 보면 실패라고 볼 수 있을 것들을 극복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될 건지에 대해서 다룰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좀 낭만주의자라 이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우리는 학생들이나 젊은 친구들한테 꿈을 꾸라는 얘기를 잘 안 하는 것 같고 그 얘기를 하는 게 말하자면 올드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여전히 성장하는 이유도 그곳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이 여전히 작동하는 사회라서잖아요.


Q. (강수) 그래서 ESC에 들어오셨구나.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네트워크!
맞네요, 여기에 꿈이 들어 있었네요. (웃음)


<이대한>

 

Q. 요즘 한국의 똑똑한 학생들은 다들 의대 진학을 하고 있고, 과학계 R&D 예산은 지난해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한국 과학계는 실패했을까요? 희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방금 꿈 얘기를 했잖아요. 다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이게 실패랑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왜 더 이상 꿈꾸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꿈을 안 꾸면 실패를 안 하거든요. 우리 사회가 뭔가를 도전해서 실패했을 때 회복하고 복구하기가 너무 힘든 무한 경쟁 사회가 된 것이 사회를 꿈꾸지 못하게 만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꿈꾼 거에 대한 책임을 자기들이 다 져야 되니까, 그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정작 더 크게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책임을 안 지고요.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패가 너무 실존적인 위협으로 느껴지면 그들에게 꿈꾸라는 얘기를 하기가 힘들어지죠.

근데 왜 저는 진화생물학자로서 꿈을 계속 꾸고 살 수 있는가, 하고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경제적으로 성공을 못해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그건 잘 알고 있어요. 저는 약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그게 뭔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별로 두렵지 않기 때문에 용감하게 꿈을 꿀 수 있었어요.

하지만 사람이 자기가 원래 누리던 것을 잃는 건 되게 힘든 일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이런 이야기는 별로 유효하지 않은 이야기인 것 같아요. 지금 젊은 세대의 실존적인 공포는 '내가 우리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못 살게 될 것 같다'잖아요. 서울에 자가로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그 세대의 자녀들 중에 서울에 자기 능력으로 자가 아파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되겠어요. 그런 환경에서 꿈꾸라는 얘기는 어떻게 보면 되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한국은 성채(성과 요새) 사회예요. 유럽에 가면 성들이 많거든요. 성 안에 사는 사람들과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행복하게 이 한국 사회의 발전과 성장의 결실을 누리는 거고, 성 밖의 사람들은 눈에는 성이 있고 성 안의 사람들의 삶이 보이고, 자기도 성에 구경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자기가 사는 거주의 공간은 성 밖이니까 그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삶 전체가 실패하는 것 같을지도 모르죠. 우리 교육 과정도 결국은 성 안에 들어가는 거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 성을 무너뜨려야 되는 건데, 성을 무너뜨리고 우리 공동체 전체가 더불어서 공동 번영하려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런 고민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더 멋진 성을 지을까, 어떻게 하면 저 성에 들어갈 수 있을까, 우리 성이 저 성보다 더 비싼 성이 되려면 우리가 뭘 해야 될까, 그런 고민만하는 성채 사회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이상적이지만 우리가 다시 조금 공동체의 수준에서 멋진 꿈을 한번 꿔보고, 또 같이 으샤으샤를 해보았으면 좋겠는데 성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굳이 그걸 할 이유가 없고 성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정보, 권력, 돈 이런 것이 다 단절돼 있으니까 하기가 쉽지가 않고 점점 집단들 사이에서 소통도 잘 안 되죠. SNS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점점 더 사회를 분절화시키고 고립화시켜요. 저는 좀 많이 두려워요.

R&D 예산 얘기하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왔네요. 저는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위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라고 질문도 해봤어요. 안 일어났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국민들 사이에서 이런 일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잠식하는 행위고,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라는 인식이 분명히 이러한 일을 막았을 것 같아요.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과학과 기술 공학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작동을 하고, 어떻게 축적이 되는지를 잘 이해하고 무엇보다도 과학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으면 당연히 과학자들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저는 희망적으로 느끼는 부분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유튜브가 막 퍼지면서 여러 유튜브 채널에 출연했어요. 되게 많이 보시더라고요. <안될과학>도 나왔고, <보다>, <카오스사이언스> 이런 데에도 나왔어요. 저를 유튜브에서 보고 알아보고 인사하시는 분들도 생겼고, 실시간에 몇 천 명, 몇 만 명씩 본다는 게 놀라웠어요. 과학을 전공하거나 현직에서 연구를 하시는 분들이 아니시더라도 문화로서 과학을 즐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또 예를 들면 안될과학이나 카오스재단처럼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종사하시는 사람들 혹은 후원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그분들이 헌신적으로 과학 문화를... 그분들 보면 진짜 감사해요.  (이대한 교수 눈에 또 눈물이 맺힌다.) 그분들 덕분에 희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쨌든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겐 1번이 가정, 2번이 연구, 3번이 과학커뮤니케이션인데 그래도 힘 닿는 만큼 과학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이유가 어떻게 보면 저 자신과 또 저의 후학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고, 이것이 우리나라의 과학 시스템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아서예요. 문제를 해결하려면 힘이 있어야 되잖아요. 힘이 없으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데, 그 힘이 어디서 나올까는 결국은 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과학의 문화적인 역량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Q.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이대한은 어떤 성공과 실패를 준비하고 있나요? 

저는 실패 성공 이런 거를 별로 생각을 안해요. 그 이유가 무엇이 될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편이고요. 대신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무엇이 될지에 대한 고민을 하면 분명한 목표가 있고 목표를 달성하면 성공과 실패가 되잖아요. 어떻게 살지는 성공과 실패가 불명확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집에 얼마를 벌어다 주는 가장이 되어야지’라고 결심하면 그건 성공과 실패가 분명하겠죠. 하지만 ‘내가 좋은 배우자가 되고, 좋은 아버지가 돼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질적인 거죠. 그래서 요즘 많이 고민하는 것은 제가 선생님이 됐으니까 이제 제자들이 제가 누렸던 그런 학문의 즐거움을 누리고, 또 본인들도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에요. 이것이 어떻게 보면 저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예요. 또 어쨌든 제가 사회로부터 여러 가지 자원들을 보이게 안 보이게 많이 받은 만큼 제 도움이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도울 수 있는 만큼 돕는 거예요.

예전에 야심이 있을 때는 Great Person이 되고 싶었어요. 요즘은 그냥 Good Person이 되고 싶은 게 제 목표예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연구실에서도 사회에서도 Great Person이 될 수 있을 만큼의 제가 그런 능력치나 인품을 갖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Good Person, 좋은 사람이 되는 거는 노력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연구자가 되는 게 지금의 목표이고 아마 어느 정도는 실패하고 어느 정도는 성공할 것 같은데 그냥 하는 데까지 하는 거죠, 뭐. (웃음)


<이대한, 김재아>


# 에필로그
인터뷰이의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난 인터뷰였다. 이강수 국장과 나는 잔인하게도 이대한 교수가 눈물을 보일 때마다 이때다 싶어 카메라를 터트리며 웃었다. 그는 당황하며 ‘원래는 정말 잘 안 우는 사람이에요!’ 하고 외쳤다. 그의 눈물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애쓰는 누군가를 언급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이었다. 좋은 사람이기에 흐르는 눈물이 아닐까 싶었다. 설사 실패를 해도 완전히 실패는 하지 않을 좋은 사람을 만나고 왔다. - 김재아

<인터뷰 당일 성균관대 교정에는 벚꽃을 만끽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숲터뷰 예고] ‘실패’란 주제로 다음에 소개할 과학기술인은 누구일까요? 과학자만 상상하시는 것은 아니시죠? 과학자 뿐만 아니라 공학자, 기술자, 과학기술학자, 과학기술정책 연구자, 대학원생, 대학생, 과학교사, 과학커뮤니케이터, 기업인, 작가, 언론인, 방송인, 활동가 등 과학기술분야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ESC회원 모든 분들이 대상입니다. 다음 숲터뷰가 만나게 될 인터뷰이도 기대해 주세요!😊

[숲터뷰 인터뷰이 추천]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고 전하고 싶은 ESC 과학기술인 추천을 받아요. 👉 추천하기


숲터뷰 운영진  
김재아(작가 및 기획자),  김효원(얼룩소 에디터), 박영민(교육공학자), 백정엽(과학커뮤니케이터 과즐러 & 뇌과학자), 이경선(환경정책연구 지리학 교수), 이기연(언어를 사랑하는 학예연구사), 장혜주(과학커뮤니케이터 그림장), 이강수(숲사이 관리인 퐝아재)


#숲터뷰 #숲터뷰_실패 #숲사이에서만난과기인


ESC 진행 (예정)행사 (참여하면 넓어지는 과학 이야기)


5월 25일(토) 15:00


5월 25일(토) 17:30


6월 2일(일) 15:00


6월 15일(토) 13:30

숲사이는 ESC에서 운영하는 과학기술인 커뮤니티입니다.
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공지 
(04779) 서울특별시 성동구 뚝섬로1나길 5, G601 (성수동1가, 헤이그라운드 성수 시작점) 

Copyright ⓒ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All rights reserved.    


운영진 게시판 


숲사이는 ESC에서 운영합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공지

(04768)  서울특별시 성동구 뚝섬로1나길 5, G601

Copyright ⓒ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All rights reserved.
운영진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