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학(책)도 (기계)번역이 되나요? [8] - 고유명사도 번역을 해요? (3) -

블랙소스
20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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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과학문화 활성화에 오래 전부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모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고 편집 과정을 거치면서 묘한 기관명의 역례를 접했다. 그 원어는 바로 CERN이다. 앞에서 약어의 ‘번역’ 문제를 고려하면서, 그럼 어디까지 약어 자체의 정체성이나 상징성을 고려할지 말지는 (역시 답이 정해진 문제는 아니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요즘 시대에 CERN이라는 지명도 정도의 약자면 그 경계 근처 어디쯤에 있는 성격이지 싶다. CERN은 (World Wide) Web의 탄생지나, ‘초거대’ 원형 (둘레 약 27km) 입자가속기를 보유한 연구소로 (이 곳의 주 연구 분야인 입자물리학의 대중적 위상에 비하면) 인지도가 점점 높아지는 셈이다. 이 곳을 가보고 싶어서라도, 입자물리학 실험 연구를 해보고 싶었는데, 먼 옛날 운 좋게도 (당시로서 한국인들에게는) 드문 기회를 경험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일명 '문호가 많이 개방되어' CERN에서 일하는 한국 연구자가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그런 영향 덕분인지) 이 곳의 공개 방문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오며, 앞서 언급한 매체에서도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아 특집 기획으로 탐방 기사를 내기도 했으니 글로벌 지명도에서는 어디 못지 않게 처질 이유 또한 그다지 없어 보인다.


이 연구소명은 우리말로는 보통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 정도면 무난하다고 보이는데, 영어 공식 명칭도 “European Laboratory for Particle Physics”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같이 작업한 매체에서는, 별도로 기관명의 번역에 대한 의견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를 바꾸지 않고 고수했다. 당연히 바르거나 그르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고, 여건의 제약으로 편집부와 더 자세한 논의를 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한국물리학회 용어집 목록에 기관명으로서는 유일하게 등장하는 예로서 CERN이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라고 버젓이 나오기 때문이지 싶다. 개인적으로 ‘핵’이 명칭에 들어가는 선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원 기관명의 ‘역사성’을 살린 셈이 되어(원래 역어 선택 의도나 과정은 알 수 없더라도) 한편으로는 괜찮은 선택이기도 하다. 다만, 대중을 주 독자층으로 하는 매체에서 ‘핵’이라는 한 음절의 추가가 얼마나 거리감이나, 심지어 (대량 살상 무기나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떠올리게 하는) 비호감을 더할지를 두고 고민을 안 하지 않았으리라 싶은데, 어쨌거나 역사적 가중치나 공식적인 학회 용어집의 권위를 따른 결과로 보인다(한국물리학회에서 어쩌다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기회다 되면 공식적으로 문의해봐야지! 아니면, 학회 관계자께서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댓글로 설명을 주시면 더더욱 좋고 감사할 일이다.).


CERN을 풀이하면, “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이다. 영어로 옮기면 ‘European Council for Nuclear Research’인데, 한때 “Center for European Nuclear Research”라는 명칭으로 (아주 틀리지는 않았더라도) 약어 조합을 때려 맞추는 해프닝도 있었다. 우리말로는 '유럽 (원자)핵 연구 협의회' 정도의 (비영리적) 기구라는 의미다. 가장 근본적인 물리학이 아핵(subnuclear) 수준으로 내려가기 전인 1950년대 초반 이야기다. 이후 물리학이 더욱 미시적으로 (즉, subnuclear 또는 intra-nuclear 수준을 파헤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고 이 조직도 더욱 짜임새를 갖추면서, 공식 명칭이 조금 바뀌었기는 하지만 원래 약어만은 역사적으로, 상징적으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라는 명칭은 역사적으로 절묘하다. 하지만 전혀 안 하지는 않지만 현재 CERN에서 연구하는 핵물리의 비중이란 입자물리 대비 극히 미미하다는 현실에 비추어서는 부자연스러운 이름이지 않을까?


한 마디만 덧붙이면, 어째 CERN 명칭을 두고 이야기할 때는 이상하게도, 이휘소와 같은 입자물리학자를 (두 분야가 연관이 전혀 없지는 않더라도) 핵무기 개발을 주도한 핵물리학자처럼 분류하는 본말 전도의 에러가 상기되고는 한다. 소설 속 이야기인데 어차피 허구든 사실이든 무슨 상관이겠냐고 할지 모르지만, 결국 CERN과 같은 기관명의 정교한 우리말 텍스트명이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가정해 본다. 이휘소 교수에 관한 작가 개인의, 또는 사회적인 택소노미적 오류는 핵이고 입자고 그게 그거 아닌가라는 막연한 생각, 내지는 더 심각하다면, 물리면 다 똑같은 물리라 거기서 거기 아닌가라는 모호한 관념, 아니 아예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개연성이 아주 크다고 본다. 고인에게 명예훼손이 성립하는지 아닌지 법리적으로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사소해 보이는 선택의 여파는 생각보다 멀리 미칠 가능성을 의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글자 하나만의 번역이나, 이를 넣거나 빼는 작업은 무척 중요하다. 아울러, 이렇게 공을 들인 텍스트가 대중에게 많이 노출되어야 하는 단계까지 가야 그만큼 유의미해지겠지만 말이다.) (원자)핵이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부정적인 쪽이라는 센스는 어쩌면 고지식한 쪽일지는 몰라도, 또 기우일지 몰라도, 막연한 대중적 풍토가 특정 과학 분야나 과학자에 대한 오해나 불신으로 이어질 소지가 없다고 누가 장담할까? 과학 문화 콘텐츠의 확산 과정에서 적어도 가끔씩은 따져봐야 할 부분이 아닐까?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과학번역

+ 과학도 번역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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