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과학적 실재론 - 과학의 진리를 둘러싼 100년간의 과학철학 대논쟁 (스타티스 프실로스 저/전현우 역 | 사월의책)

202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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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어떻게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가 실재한다고 말하는가?
100년에 걸친 ‘과학적 실재론’ 논쟁을 종결짓는 과학철학의 교과서!


‘전자’나 ‘블랙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자가 과연 실재하느냐의 문제는 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과학철학의 골머리를 썩혀온 주제다. 그런 존재자들은 다만 흔적만이 관찰될 뿐 어떤 첨단 도구로도 존재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장 과학자들과 상식인들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주제도 철학자들의 메스 아래서는 의심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과거에도 이런 입증되지 않은 존재자가 있었지만 죄다 거짓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플로지스톤’이나 ‘에테르’가 바로 그런 사례다. 그렇다면 이렇듯 관찰 불가능한 대상에 대해 말하는 과학 이론은 단지 가설적 도구에 불과한가? 우리는 경험한 것만을 믿어야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잠정적 모형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과학적 실재론’은 사실 과학철학의 오랜 논쟁사에서 거의 승리를 거둔 이론이다. 현재 과학철학 분야에서 과학이 다루는 이론적 존재자들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는 별로 없다. 저자 스타티스 프실로스는 “모든 이론적 존재자는 경험으로 환원해서만 진위를 판별할 수 있다”는 경험론의 주장이나, “과학의 역사는 폐기된 이론들의 무덤”이라는 비관적 견해에 정면으로 맞서서, 이 세계는 우리가 가진 최상의 과학 이론이 설명하는 방식대로 실제 존재한다는 낙관적 견해를 제시한다. 이 책 『과학적 실재론』은 첫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과학적 실재론뿐만 아니라 100년간에 걸친 과학철학의 주요 쟁점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점에서 ‘과학철학의 교과서’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책이다.

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자가 문제가 되는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철학은 끝없는 논쟁의 전쟁터”라고 쓴 바 있다. 과학철학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과학철학은 20세기 초 ‘분석철학 운동’이 대두되면서 대표적인 경험 과학인 자연과학을 분석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함께 출범한 철학 분야이다. 경험을 중시하는 반형이상학적 경향의 분석철학은 출발 때부터 과학이 다루는 관찰 불가능한 이론적 존재자가 왜 실재한다고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과학철학 논쟁에 불을 붙였다. 그것은 당시 막 대두된 원자 가설 등에 대한 경험론적 철학의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당시에서 볼 때 원자는 실재가 아닌 이론적 구성물이라고 해도 현상을 설명하는 데 특별히 부족한 점은 없었으며, 경험을 넘어서는 초과적 존재는 과학적 탐구에 불필요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세계에 대한 경험적 어휘로도 과학의 성공을 충분히 해명할 수 있는데, 왜 어색한 개념적 존재자를 추가로 도입해야 하는가?

과학적 실재론은 경험론의 이런 회의주의적 경향에 맞서, 성공한 과학 이론은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와의 관계를 포착해왔고 그럼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과학 이론이 기술하는 이론적 존재자들은 완전한 진리는 아닐지언정 진리 근접적이며, 이들 대상은 우리의 경험 여부를 벗어난 마음 독립적 대상들로 실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초과하는 대상들을 다룰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한다.

요컨대 과학적 실재론 논쟁은, 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있는 존재자의 유형을 경험 가능성의 기준으로 최소화하려는 경험론의 축소주의적/불가지론적 입장과, 과학은 경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이 세계에 존재하며 언제나 그런 존재들을 언어적/이론적으로 포착해왔다고 보는 실재론의 입장 사이에 벌어진 대논쟁이다. 이 책은 이런 철학사적 배경을 1~3장에 걸쳐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과학에 대한 낙관주의 대 비관주의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이 실재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실제로 많은 부분 도달했다는 견해를 취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낙관주의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경험론 또는 반실재론은 과학이 실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고, 실재를 포착하기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비관론이라 할 수 있다. 이 대결은 이 책 5~6장에서 집중적으로 소개된다.

그렇다면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에 대한 경험론의 비관적 견해에 맞서서 어떻게 낙관주의를 옹호하는가? 실재론의 바탕에는 우선 ‘자연주의’가 있다. 자연주의란 이 세계가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존재하며, 초자연적 존재는 현실세계에 대한 어떤 인과적 영향도 가질 수 없기에 이론적 존재자 역시 자연종의 하나라고 보는 입장이다. 즉 과학은 이론적 대상들을 이 세계의 일부로 포함하는 통합적 과학상을 제시해왔다는 것이다. 반면 경험론 진영은 더 많은 존재를 인정하는 이론일수록 그 존재자들 각각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하기에 이론이 틀릴 확률은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연주의에 기초한 광범위한 형이상학적 주장보다는 불가지론을 택하여,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실만으로 과학 이론을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과학적 실재론은 이에 대해 어떤 방어를 할 수 있는가?

프실로스는 이 책의 II부, 특히 5~6장에 걸쳐 이 같은 경험론의 회의적 도전에 대응한다. 경험론자들은 과학의 성공 기준을 너무 낮게 잡고 있으며, 과학의 역사를 볼 때 실패한 듯 보이는 이론도 그 구성요소 일부는 성공한 후속 이론에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에 대한 과학의 기술이 언제나 실재에 대해 근사적인 진리를 제시해왔다는 것을 두 가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즉 (1) 열역학 이전의 칼로릭 이론과 (2) 19세기 광학 에테르와 같은 과학사의 실제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연언 논증과 귀추

저자 프실로스는 이 책에서 과학적 실재론이 경험론 또는 반실재론에 대해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첫 번째 무기로 ‘연언 논증’(conjunction argument)을 제시한다. 각기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 이론 A와 B가 경험적으로 참이라고 할 때, A와 B에서 논리적으로 추론한 새로운 과학 이론 A&B는 경험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지만 A와 B가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설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A&B를 거짓이라 할 수 있는가? 경험적으로 적합한(진위를 가릴 수 있는) 것만을 유의미한 진술로 보는 경험론은 과학 이론의 이런 확충적 성격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경험론이 과학적 실재론에 가하는 치명적 비판은 실재론이 ‘순환논증’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실재론이 토대로 삼고 있는 자연주의(과학의 성공은 자연적 실재를 포착했기 때문이지 우연한 기적이 아니라는 ‘기적 없음 논증’)는 그것이 설명해야 할 과학의 (자연스런) 성공을 동일한 자연주의 논거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에 대해 과학적 실재론은 ‘기적 없음 논증’이 나쁜 종류의 순환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억이 신빙성이 있기 때문에 기억을 사용하는 것이지, 기억의 메커니즘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방법을 정당화하려면, 그것이 참된 믿음을 산출할 정도의 신빙성이 있다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쥐가 있다는 흔적을 보고 고양이를 들여놓지만, 쥐가 일찌감치 떠났다고 해도 그 조치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어진 사실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채택하고, 그로부터 다시 여타의 사실을 설명하는 추론법인 ‘귀추’(abduction) 또는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은 결코 순환논증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이론적 추론이 없다면 우리는 과학은커녕 일상생활도 잘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 이론의 성립과 성공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옹호인 이 논증은 4장과 9장에서 집중적으로 제시된다.

과학철학 100년의 논쟁사와 그 종지부


이 책의 또 다른 가치는,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옹호를 넘어 과학철학에 등장했던 여러 입장을 자세히 소개하고 그 주장과 반박 논지를 일목요연하게 안내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전적 실증주의자인 헴펠이나 루돌프 카르납이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에 대해 취했던 중도주의적 견해, 과학 이론을 도구적 체계로 본 에른스트 마흐와 피에르 뒤엠의 도구주의적 입장, 래리 라우든이 제시한 과학사에 대한 비관적 귀납, 그리고 가장 강력하고 세련된 경험론자인 반 프라센의 구성적 경험론 등이 소개되고, 이들에 맞서 실재론의 옹호자였던 힐러리 퍼트넘을 비롯해 리처드 보이드와 데이비드 퍼피뉴의 견해도 자세히 설명된다. 또한 과학의 이론 명사를 모두 관찰 명사로 대치할 수 있음을 보여준 크레이그 정리나, 과학 이론의 초기 설득력을 따지는 베이즈주의 확률론 등은 이들의 논쟁이 만만치 않은 논리적?수학적 근거를 가지고 펼쳐졌음을 보여준다.

이런 논쟁사를 통해 저자 프실로스가 도달하는 입장은 ‘인과적 기술 이론’이라는 실재론적 견해이다. 인과적 기술 이론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과학이 도입하는 이론 명사는 실재하는 존재자를 지시하고 있으며, 둘째, 과학 이론은 이전의 성공적 이론이 대상에 대해 제시한 핵심적 기술구를 참된 것으로 수용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과학 이론이 관찰 불가능한 존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진리에 접근하고 있으며, 이 세계의 현상에 대한 신빙성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현재 우리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과학 이론들의 철학적 토대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과학이 과연 현실의 이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에 불과한지를 곰곰이 따져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 시대에 과학의 역할이 중요하면 중요해질수록 현장의 과학자, 철학연구자, 학생 모두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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