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정보라 저 | 래빗홀)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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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

직접 움직이고 실천하는 소설가 정보라의 진실한 픽션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자였던 작가님께 메시지를 받았다. 올해 최종 후보자들이 시상식에서 가자지구 학살 반대 성명을 낼 계획인데 참여하겠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당장 동의했다. (…) 시상식 당일, 저스틴 토레스 작가가 소설 부문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토레스 작가는 수상 소감을 짧게 끊고 우리를 모두 무대 위로 불렀다. 빌랄 작가가 앞에 나서서 성명문을 읽었다.(정보라 칼럼, 〈팔레스타인 집단 학살을 멈춰라〉, 『여성신문』 2023년 11월 22일 자)


2023년 가을, 작가 정보라는 『저주토끼』가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뉴욕으로 향했다. 맨해튼 공공도서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는 길에서 사탕을 팔고 있던 열 살배기 아이를 본 일에 관해 이야기하며 “이런 일들은 나를 화나게 만들고, 화가 날 때 글을 쓴다”라고 말했다. 시상식에서 그는 가자지구 학살 반대 성명을 낭독하는 자리에 함께했고, 폴란드 크라쿠프 중앙광장에서도 팔레스타인 내 집단 학살을 규탄하는 시위에 함께했다.


‘사실보다 더 진실한 이야기’라는 소설의 성격에 충실한 정보라의 첫 자전적 연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해양 (외계) 생물이 출몰하는 여섯 편의 소설이 모였지만 우리 세계의 모순을 거울처럼 비춰낸다. 노동, 장애, 기후와 생태 등의 이슈가 단지 머릿속 구호로 멈추지 않고 실제 거리에 나가 땡볕이나 추위를 견디며 목소리를 내온 작가의 행보가 생생하게 녹아 있다. 격발하는 분노를 담은 거친 문장들이 『저주토끼』를 비롯한 많은 전작과 닮았지만, “이 소설의 대부분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작가가 2020년대를 지나오며 느낀 솔직한 고민과 남편을 만나 사랑하게 된 시절의 흔적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한편 종잡을 수 없는 서사가 펼쳐지며 외계 존재와의 조우로 코믹한 장면이 연출된다는 점에서 독특한 매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바위에 부딪혀 부서져도 다시 솟구치는 파도처럼


나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나의 천직이었다. 학생은 선생이 없어도 스스로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학생이다. 그러나 선생은 학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학생들을 사랑했고 강단을 사랑했고 교육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다. 그것이 내 존재의 의미였다. 그러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학교가 원하는 대로 조용히 사라져줄 수는 없었다. (〈문어〉, pp. 18~19)


예전엔 학생들의 강의를 한다는 것이 제 삶을 완전히 결정했어요. 철도 민영화나 세월호 서명 나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고, 학생들을 마주 볼 때에 떳떳하고 싶어서였고, (...) 학생들 앞에서 저는 책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정보라 인터뷰에서, 『한겨레』 2022년 7월 16일 자)


이 책은 강사법 개정과 팬데믹 이후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들을 대량으로 해고하는 사태를 배경으로 한 〈문어〉에서 시작된다. 한밤중 대학 본관에 나타난 문어는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라고 엄숙하게 외치지만, 농성 천막을 홀로 지키던 위원장님은 잠결에 이 문어를 잡아 라면에 넣어 먹으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고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의 초반 5~6쪽은 2021년 모 대학교 농성장에서 썼으며, 강단과 학생을 향한 작가의 짙은 그리움도 드러나 있다. 연작은 이주 노동자와 해양 생태계를 근심하는 동시에 새로 만난 가족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내는 〈대게〉와 〈상어〉로 이어진다. ‘이길 것 같지 않아도’ ‘도망칠 곳이 없어도’ 싸워야 한다는 남편과의 단단한 유대감이 이해되면서, 암 투병 중인 그를 잃을 수 없는 작가의 절박한 마음도 읽어낼 수 있다. 이어지는 소설 〈개복치〉에서는 인형과 게임을 좋아하는 선우의 바닷속 탐험을 다루며 남들과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각자의 삶의 방식을 찾으면 된다는 따뜻한 조언을 건넨다. 마지막으로 우주해파리와의 접촉 이후 검은 정장 입은 사람들의 진실을 알아가는 여정이 담긴 〈해파리〉와 〈고래〉로 정보라의 해양 생물 연작은 끝을 맺는다.


여섯 종의 해양 생물과 얽혀 갑자기 연행되고 억류되기를 반복하지만, ‘나’와 ‘남편(위원장님)’은 인간 종을 넘어서 여러 생명체와 연대하며 견고한 바위 같은 어려움에 부딪혀도 저항을 이어나간다. 이는 변화의 가능성을 믿고 거리에서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쫓겨나지 않는 세상, 군림하지 않는 평화를 위해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름반도를 점유한 이후 크름반도의 고질적인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인근 흑해 바닥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알기로 구멍을 스물여섯 개 정도 뚫었다는데 크름반도의 물 부족 문제가 해결됐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고 우크라이나 측에서 크름반도로 식수를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는데 러시아는 물론 거절했다. (〈대게〉, p. 64)


소금값은 벌써 몇 달 전부터 통제 불가능하게 치솟았다. 평생 먹을 소금을 미리 사놓을 수는 없다. 그리고 해수는 지구를 순환한다. 바닷물이 오염되면 우리는 다 죽는다. (〈고래〉, p. 223)


이 이야기는 시간강사 당사자로서 처우 개선을 위해 싸웠던 서울의 이야기에서부터 포항에서의 생활과 연대의 기록을 담아 지역적인 사건들로 구성되는 한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일본의 원전 폐수 방류까지 국제적인 문제에 관한 입장도 드러나 있다. 세계가 무너질 때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지구가 망가지면 모든 생물이 터전을 잃는다는 자명한 사실에서 비롯한 흐름일 것이다.


작품 속 문어는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라고 집요하게 외치고, “세상은 왠지 점점 나빠지는 것 같다”고, “혼자서 대항할 방법이 없다. 속상하다”며 작가도 근심하지만, 이 책을 덮고 나면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pp. 263~266)는 메시지가 선명해진다. 책장을 덮고 나면 모두가 쫓겨나지 않고 굶주리지 않으며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부지런히 평화를 위해 싸우는 지구 생물체 모두 행복하길 빌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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